기업들은 지금 ESG를 멈춘 것이 아니라, 전략적 침묵 중이다.
2025년,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ESG와 지속가능성은 거센 정치적 역풍을 맞았습니다. 언론은 연일 "기업들이 기후 공약을 철회하고 있다"는 헤드라인을 쏟아내고 있으며, 기업 연합체들은 해체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비즈니스 현장의 진실일까요? 최근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 실린 아티클은 우리가 보고 있는 '후퇴' 현상과 실제 데이터 사이의 흥미로운 괴리를 있는 듯합니다. 이 글에서는 HBR의 데이터를 통해 글로벌 기업들의 은밀한 움직임을 분석하고, 이것이 한국 기업들에게 던지는 시사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후퇴는 없었다, 다만 침묵할 뿐
HBR은 기업들의 대응 방식을 다음 4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이 분류가 보여주는 핵심은, ‘철회’보다 ‘침묵’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입니다.
미디어의 보도와 달리, 실제 데이터는 기업들이 지속가능성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S&P 100, Fortune 500 등 글로벌 75개 주요 기업을 추적한 결과, 실제로 공약을 철회하거나 축소한 기업은 전체의 13%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53%의 기업은 기존 계획을 유지하고 있으며, 32%는 공약을 더욱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즉, 10곳 중 8곳 이상의 기업이 여전히 지속가능성을 붙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위 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현상은 '그린허싱'의 확산입니다. 지속가능성 프로그램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기업은 대다수이지만, 이를 대외적으로 재확인하는 기업은 소수였습니다. 정치적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은 이제 '하는 것'을 멈춘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말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2. 붕괴되는 '연대', 그러나 견고한 '개인기'
개별 기업은 각자의 자리에서 지속하고는 있음에도, 기업들이 모여 만든 '연합(Coalition)'은 빠르게 탈퇴하고 있습니다. 특히 금융권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넷제로 은행 연합(NZBA)이나 보험 연합(NZIA) 등에 가입되어 있던 연구 대상 기업의 100%가 탈퇴하거나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과거 이러한 연합은 업계 표준을 만들고 공급망 전체를 움직이는 '규모의 힘'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압박이 거세지자, 기업들은 눈에 띄는 집단 행동에서 이탈하여 개별적인 생존 모드로 전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업들에게는 공통된 회복 탄력성의 DNA가 있었습니다.
# 운영 통합: “운영에 녹아든 전략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지속가능성이 제품 설계, 공급망 관리 등 비즈니스 모델 깊숙이 통합된 기업들은 이를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B2B 기업들은 공약을 축소한 비율이 1% 미만에 불과했습니다.
#가치 창출: “돈이 되는 지속가능성만이 살아남는다.”
지속가능성 투자가 비용 절감이나 매출 증대와 같은 확실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때, 경영진은 정치적 비판 앞에서도 이를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리더십의 안정성: “전략은 CEO의 임기보다 길어야 한다.”
재임 11년 이상의 베테랑 CEO 중 47%가 공약을 확대한 반면, 부임 3년 미만의 신임 CEO들은 69%가 외부 압력에 반응하여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THOUGHT LEADERSHIP: "침묵의 대가는 무거울 것이다."
HBR의 데이터는 우리에게 명확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이면에서는 여전히 치열하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점에서 한국 기업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시사점이 있습니다.
1. 이것은 실행의 위기가 아니라 '신호의 위기'다
오늘날 지속가능성의 위기는 기업들이 행동을 멈췄기 때문이 아닙니다. 행동은 하되 신호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지정학적 상황, 특히 미국의 정치적 소음은 기업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은 이미 공시 의무화와 탄소국경조정제도 등을 통해 이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만들고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 엇갈린 신호 속에서 '전략적 침묵'을 선택한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한국 기업들이 이 '신호의 공백'을 '시장의 후퇴'로 오독(誤讀)하는 것입니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조용해졌다고 해서 우리도 손을 놓아버린다면, 그것은 소음에 속아 실체를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오판이 될 것입니다.
2. 지금의 '모래알' 격차, 미래엔 감당 못 할 '바윗돌' 된다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침묵의 대가'입니다. 지금 당장은 조용히 내실을 다지며 나아가는 경쟁사와, 분위기에 편승해 손을 놓아버린 기업 간의 격차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신발 속의 작은 모래알처럼 사소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물리적 실체이기에, 지속가능성 이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시장의 분위기가 바뀌고 규제가 다시 조여올 때, 소리 없이 나아갔던 경쟁 기업들과의 기술적, 운영적 격차는 더 이상 모래알이 아닐 것입니다. 그때는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바윗돌'이 되어 생존을 짓누르게 될 것입니다.
3. '보여주기'를 멈추고 '돈이 되는' 내재화에 집중해야 할 때
지금은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통해 기업의 ESG활동을 마케팅화하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HBR이 지적한 대로 이제는 '운영 통합'과 '가치 창출'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지속가능성은 이제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비즈니스 설계의 문제입니다. 운영에 통합되지 않은 ESG는 정치적 외풍에 쉽게 무너집니다. 한국 기업들은 겉으로 보이는 정세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에너지 효율을 높여 비용을 줄이고 공급망을 재정비해 리스크를 낮추는 '실질적인 가치'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멈춰 있는가, 나아가고 있는가? 결국 미래의 승자는 지금 결정되고 있습니다. 남들이 멈췄다고 생각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지속하고 있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지속가능성은 지금 비용 항목입니까, 경쟁력의 원천입니까? 아니면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이유로 멈춰 있습니까? 오늘의 침묵과 방관이 내일의 부메랑이 되서 돌아오지 않도록, 냉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현실적인 대응방안'을 키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 글로벌 기업들이 조용한 이유는 포기해서가 아니라
'전략적 침묵' 중이기 때문입니다.
본 글은 Are Companies Actually Scaling Back Their Climate Commitments? (HBR, Sep 2025) 저자: Neil Hawkins & Kelly Cooper을 바탕으로 필자의 생각을 담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