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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6. 2024

코로나와 함께 컴백

다시 돌아온 탕아?

동생은 장애인 거주시설에 그가 17살이 되던 해에 입소를 하였다.

25년 가까이를 시설에 머물렸다. 

나는 편도 100킬로 가까이 되는 곳의 반복 운전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2019년도 엄마가 뇌종양 수술을 하시고 방사선 30회를 받으시는 동안 동생만을 찾으셨다.

뇌수술을 하면 거의 모든 환자들에게 섬망증상이라는 것이  나타나는데, 

엄마는 섬망 증상 속에서도 동생을 찾으며 자기가 죽게 되면 남겨질 동생이 불쌍하다고 한없이 우셨다.

엄마가 수술할 당시에는 코로나라는 것은 없었다.

서울에서 수술을 받으셨기에 수술 후 보름쯤 뒤에 엄청나게 많은 약들과 함께 

방사선 치료 전에 일단 퇴원은 하셨다. 

퇴원하시는 당일 날에 머리에 박혀있던 나머지 의료용 스템플러 같은 것을 오전에 제거하고 

병원 근처에서 식사를 한 뒤 동생을 데리러 출발을 했다.


퇴원하면서 동생이 보고 싶다고 하셨기에 병원에서 400킬로 떨어진 

동생을 데리러 가니 밤 7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미리 시설 측에 양해를 구해놓은 터라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동생은 많이 상기된 상태였다.

동생과 엄마를 데리고 보름이나 가지 못했던 집으로 가니, 

나는 장시간 운전과 긴장으로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수술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 쪽이 자유롭지 못하셨고, 

뇌수술 하신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움직임이 많이 불편하셨다.

엄마도 동생도 나의 챙김이 필요한 가족이었다.


엄마는 다음날부터 스스로 재활운동을 시작하셨다. 

의료용 지팡이를 짚고 동생과 함께 집 근처를 걷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많이 넘어지시기도 하셨는데 그때마다 동생이 엄마를 일으켜 세워줬다고 

엄마가 동생을 무척이나 대견해하셨다.

수술 후 보름, 한 달, 그리고 2달 간격으로 병원을 가다 보니 어느새 방사선 치료 시간이 다가왔다.

엄마가 방사선 치료받는 2달 동안은 동생을 다시 시설로 보냇 지만,

다시 시설로 보낼려니 엄마가 너무 마음 아파하셨다.

동생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많이 얌전하고 차분해있었지만, 동생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온다면

나는 동생과 엄마 둘 다 돌봐야 하는 입장이 된다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힘이 들었다.


우리의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잘 아는 시설에 오래 계셨던 복지사 선생님 한분과 몇 달을 걸쳐

가감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분은 동생이 시설 입소 몇 년 뒤 시설에 입사를 하셨기에,

우리의 상황과 시설의 상황들 모두 잘 알고 계셨고 무엇보다 동생에게 진심을 다해 잘 대해주셨다.

이분이 동생의 "자립"을 적극 추천 해주셨다.

(사실 동생의 자립은 이분이 몇 년 전부터 추천했었지만 자립에 실패를 하게 되면 

동생은 시설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망설이고 있었던 터였다.)


나라에서 시설 장애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서 잘 지낼 수 있게 해주는 복지 사업을 추친하는 중이라고

지금 자립을 하게 되면, 동생에게 생활적으로 더 나아질 거라고 추천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런 고민은 우리나라에 코로나가 처음 들어왔었던 시기였던 2020년 1월이었고, 

엄마가 그토록 보고 싶다던 동생은 

시설에 있었고 코로나가 그들의 만남을 막고 있었기에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옵션이 없었다.

(이때 코로나로 모든 단체시설, 병원등의 면회가 일절 금지 되었다.)

몇 달을 동생을 보지 못하자 엄마는 자립을 하든 시설에 퇴소를 하든 동생을 데리고 나오고 싶어 하셨다.


동생처럼 중증 장애인의 자립은 활동 보조사 선생님의 시간을 본인의 장애 정도에 따라 시간 분배를 받아,  

기거하는 집으로 활동보조사 선생님이나 복지사 선생님들이 

밥이나 빨래 그리고 복지관 동행 등 모든 것들 맡아서 진행해 주시게 된다. 

처음에는 동생은 1년 정도를 2~3명 정도 같이 지정된 집에서 머무르면서 자립을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동생이 자립을 연습하는 주택은 복지 기관에서 위탁운영 하는 곳이었고,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동생은 하루에도 몇 번씩 " 자립"을 말하며 너무나 좋아했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언제든지 동생을 볼 수 있어서 엄마도 너무 좋아하셨다.

이렇게 동생의 첫  자립이란 것이 시작되었다.


사실 동생의 자립은 코로나로 시설 면회가 전면 금지되면서 하게 되었으니 

면회금지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까지 동생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올 용기를 못 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가 동생 자립의 1등 공신인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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