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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06. 2024

두 여자

나와 엄마만 남았다

내가 어릴 때 아빠는 장남에 공장을 하셨다.

그 덕분에 언제나 우리 집에는 사람이 많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 10명은 넘게 밥을 먹었다.

적어도 아빠가 공장을 그만두시게 되기 전 까지는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1998년, 아빠가 돌아가신 그해 엄마와 나 둘만 덩그러니 남았다.

엄마 나이 46이셨고, 아빠나이 50을 넘기시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신기하게도 우리 집의 형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공장으로 쓰던 땅이 도로에 편입되면서, 보상금을 받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집 현관 앞까지 도로포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덕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파트란 곳에서 살게 되었다.

전셋집이었지만, 나는 정말 이곳이 천국이란 생각이 들었다.

50년이 다 되어가던 바퀴벌레와 지네가 매일 나오는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만 살다가

아파트란 곳에 살게 되니 이런 별천지가 있나 싶었다.


물을 틀면 따뜻한 물이 자동으로 나오고,  집밖 무서운 푸세식 화장실에 쪼그려서 앉지 않아도 되고

겨울에 밥을 먹을 때 외투를 입고 밥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우풍이 너무 심해서,  겨울에 밥을 먹을 때 외투는 필수였다.

무엇보다 좋은것은 대문이였다.

예전 주택은 대문이 없어서 낮선 사람들이 수시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수있는 구조라서 나는 그집에 살면서 항상 불안해 했었다.

모르는 사람이 부엌에서 물한잔 마시고 가는 경우도 꽤 있었고,나에게 무서운 화장실은  언제나 이방이들의 해우소이기도 하였다.

그집은 원치않는 개방형 ㆍ쓰러져가는 모델하우스를 대표했었다.

그런데 아파트는  문만 열고 들어가면 함부로 내가 사는 집으로 들어올수가  없는것이 너무 마음에 쏙 들었다


형평은 나아졌지만, 엄마와 나의 사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멀어져 갔다.

엄마는 나의 철없는 행동을 매일같이 꾸짖었고, 나는 엄마가 너무나 미웠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교회에 사시다 시피 하셨다.

집으로 가면 엄마는 교회를 가시거나, 교회분들과 집에서 모임을 하시거나,

산속 기도원을 가셔서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날도 많았었다.

엄마와 잘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마주치기만 하면 엄마에게 야단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엄마와 같이 살고 싶지가 않았다.


세상 누구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자존감이 한없이 낮은 사람이었다.

동생의 장애, 아빠의 부재, 엄마의 꾸중...

내가 세상 필요 없는 사람으로 느껴졌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자주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술은 내 나름의 도피쳐였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가라앉고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졌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랬었다.

저녁에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서 엄마라도 마주치면,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술을 먹는다고 야단치셨다.

 사람들이 아빠없는 애가 술이나 퍼마시고 다닌다고  

이유를 붙여 야단과 잔소리를 하셨다

도대체 얼마의 애도기간을 거치고 술을 먹을 수 있는지,

누가 나에게 정확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에게 남은 가족은 엄마와 나 둘뿐인데, 두 여자는 매일매일이 전쟁 중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와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나는 남편을 떠나보낸 엄마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엄마도 너무 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내서

서로에게 처음 닥친 큰 슬픔을 어떻게 견딜지 몰라서

서로를 미워하며, 탓하며 자신을 위로했었던 것 같다.

모든게 처음이라 너무나 서툴렀었다.

위로도 슬픔도 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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