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의 컬래버레이션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느끼는 것은, 시간이 나이의 앞자리의 숫자만큼 빨리 흘러간다는 것이다.
나는 결혼을 했고, 엄마는 혼자 사시게 되었다.
엄마의 유일한 사위이자 나의 남편은 처음부터 엄마의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결혼을 결심한 큰 이유증의 하나는 엄마에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나는 언제나 엄마를 벗어나고 싶었고, 동생을 멀리 두고 살고 싶었다.
그 시간의 엄마는 모든 것이 나와는 맞지 않은 사람이었고, 엄마 또한 그러했던 것 같다.
결혼을 해서 엄마와 떨어져서 살면서 점점 엄마에게 동생을 떠넘기고,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은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는 되지 않는 법.
결혼을 해도 수시로 특히 주말에는 엄마를 모시고 동생에게 가는 일들은 계속 반복되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엄마와 같이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 남편과는 같이 살 수 없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고수하셨지만,
엄마가 살던 빌라에 주무시는 사이 도둑이 들면서, 극심한 공포를 느끼셨던 엄마는
도둑 든 1주일 후에 우리 집으로 합치셨다. 도둑이 우리의 합가를 도운 것이었다.
살던 아파트는 24평이었는데 성이 다른 3 사람이 한집에 산다는 것...
아침 화장실 사용은 고문이 따로 없었다.
엄마는 1시간도 안 돼서 화장실을 가시는 분이고,
남편은 한번 화장실에 가면 잘 나오지 않는 타입이었다.
엄마는 상가 화장실을 자주 이용하시게 되었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그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다.
좁은 24평 화장실 한 개의 집에서는 5년가량 살았었다.
후에 근처 50평에 화장실 2개의 집으로 이사할 때는 너무 설레었다.
더 이상 화장실 문제로 눈치볼일도 없고, 짐 둘 곳이 없어 쌓아두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결혼할 때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자세히 하지 않았다.
동생이 있는데 장애가 있어, 시설에 있다는 정도만 이야기를 했었다.
엄마와 같이 살고 난 뒤 동생은 몇 년 동안 집에 오질 못했다.
나는 남편에게 동생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 나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 같았었다.
동생도 나이가 40대에 접어드니, 예전의 나쁜 습관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나이 탓이었을까? 지랄 총양의 법칙이었을까?
이사를 하고 동생과 엄마, 나 세 명이서 처음으로 10일 넘게 유럽 여행을 갔다 왔다.
여행동안 동생은 너무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도, 외국사람들의 모습들도
여행 내내 모든 과정들을 신기해하고 즐겁게 여겼다.
여행 다녀온 뒤 조금 있다 나는 남편에게 동생을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예전의 동생이 아니었다. 많이 얌전해지고 하지 마라고 얘기를 하면 들어주었다.
엄마는 동생의 변화가 좋으셨지만, 한편으로는 나이 들어서 늙어가는 동생과 자신을 안타까워하셨다.
이사도 했고, 엄마와 사이도 좋아졌다.
여행도 다녀왔고, 동생도 나이가 드니 수술했었던 흉터는 배에 깊이 남아있고
여전히 설사도 자주 하긴 하지만, 그 상태로 익숙해져서 적응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스트레스로 갑상선 암에 2번이나 걸렸지만, 잘 넘겼다.
내가 아프고 나니, 어느 날 기억력이 없고 일상생활에 자주 쓰는 단어도 잘 기억 못 하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증상도 없었다. 엄마나이 60대 중. 후반 이셨지만 건강하셨다.
돈이 아까워 받지 않겠다는 검사를 나는 억지로 치매검사와 MRI, MRA 검사를 받게 했다.
그저 엄마가 건강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눈앞으로 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는 달리 엄마의 뇌에 탁구공만 한 종양이 발견되었다면서
의사가 검사 후 1시간도 안 돼서 달려와서 결과를 얘기해 주셨다.
뇌종양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던데... 그냥 두면 없어지는 것인가?
엄마의 뇌에 있는 종양은 3센티가 넘으며,
뇌에 있는 종양의 크기가 1센티가 넘는 종양은 수술로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다.
뇌종양센터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다고 하셨다.
2019년 8월 나는 서울에 여러 군데 병원을 예약하고 엄마를 모시고 서울로 향했다.
4군데 병원을 2박 3일 동안 진료를 봤었고, 유명하신 선생님들이 다들 수술만이 답이라고 하셨다.
엄마에게 어느 선생님께 수술받고 싶으신지 물었고, 1달 남짓 후 수술예약을 하고 내려왔다.
수술을 잘 받으려면 체력을 길러야 한다며 엄마는 집 근처를 매일 만보이상 걸으셨다.
그리고 동생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 동생을 데리고 왔다.
수술까지 1달 넘게 남아있었고, 동생은 예전과는 달리 얌전히 엄마의 체력 기르기 메이트가 되어주었다.
수술하기 전날 동생에게 엄마 수술받는다고 건강해져서 다시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시설로 동생을 데려다주었다.
세브란스에서 수술을 받으시기로 하셨다.
엄마는 수술받기 전 목요일에 입원을 하셨고, 수술 전 여러 가지 검사를 하셨는데 뇌동맥류가 발견되었다고
담당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뇌동맥류 소식을 토요일 3시쯤 담당 교수님꼐 나 혼자 듣고
엄마가 계시는 병실로 가는 도중 검색을 해보았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뇌 속의 시한폭탄이란다.... 당장 월요일이 수술인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엄마한테 솔직히 모든 것을 얘기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애기까지...
엄마는 담당 교수님꼐 다시 물어보면 안 되냐고 하셨지만,
그때는 병원의 모든 업무가 다 끝나고도 남을 토요일 4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교수님이 퇴근하셨겠지만, 혹시나 하고 뇌종양 센터로 가보았다.
그 건물의 불이 다 껴져 있었지만, 교수님 방만 불이 켜져 있었다.
교수님께 공부를 방해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월요일 뇌종양과 함께 시한폭탄이라고 불리는 뇌동맥류도 같이 수술해 주시면 안 되냐고 여쭤보았다.
교수님께서 지금은 뇌종양이 수술이 급한단계이며, 뇌동맥류와는 수술 부위가 전혀 달라
같이 수술 진행하실 수 없다고 하셨고, 뇌종양 수술 마친 후 뇌동맥류에 대한 조치도
안전하게 취하겠다고 걱정 말라고 하셨다.
정말 너무너무 감사했다.
엄마 생명의 은인이셨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엄마는 병원에 총 15일을 계셨고, 그때의 기억은 섬망증상으로
지금은 하나도 기억을 하시지 못하신다.
수술 끝나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종양을 싸고 있던 막까지 아주 꺠끗이 제거를 하셨다고...
엄마의 뇌종양은 오른쪽에 있었다. 수술 후 후유증으로 엄마는 왼다리를 쓰시지 못하셨다.
엄마는 걸음이 많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잘 걷지를 못한다니...
하루는 죽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하루는 동생이 보고 싶다고 우셨다.
수술 후 왼쪽 다리 재활을 위해 링거 폴대를 지지대 삼아 매일 병실 복도를 걸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