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언제나 어린아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나 동생에게 시간이란 큰 의미가 없었다.
동생은 시설에 가서도 변화가 없었다.
동생이 속한 시설에는 처음 갔을 때 남녀 발달 장애인이 200여 명 넘게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를 두고 양쪽에 화장실이 딸린 방들이 있었다.
방에는 처음에는 7~8명이 머물렀으며, 복합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정말 신이 있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었다.
그냥 불행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평생 발달장애와 신체장애를 가지고 사는 분들도 많았고, 아예 누워서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동생이 있는 곳은 중증 장애인이 대다수를 이뤘으며,
대부분의 이용이들의 가족들이 찿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나와 엄마가 제일 자주 찿아 갔었다.
시설에 머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시설 이용인들(그렇게 불렀다)은 줄어 갔다.
가족이 그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가는 경우는 없었다.
둘 중 하나였다. 돌아가시거나 혹은 정신이나 몸이 그나마 나은 뇌병변 장애인들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장애인 복지 정책이 업그레이드되면서 <자립> 이란걸 했다.
-자립에 관해서는 다른 회차에서 따로 언급하도록 할 예정이다.-
집에서 시설까지 차로 1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동생이 시설을 떠나기 전까지
그 길을 몇백 번을 왕복 진자 운동처럼 운전했었다.
엄마는 동생을 데려다주고 올 때면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다시 집으로 데려오려고 나와 엄마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동생은 일단 잠을 잘 자지 않았다. 하루에 3~4시간도 채 자지 않았고, 우리가 자는 틈에 밖으로 나가 버리기를 반복하고, 그 시절에는 장애인 복지관 같은 곳이 전혀 없었기에,
하루종일 엄마와 내가 교대로 동생을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생업이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나는 짧은 여행도 자주 가려고 노력했고, 동생과 엄마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것을
많이 좋아해서 나는 그들의 전담 운전기사가 되었다.
나에게 동생은 나이 들지 않는 피터팬 같았다.
항상 3살이었다.
동생이 시설생활을 총 25년 가까이했는데,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느 한날은 담당자의 딸이 결혼한다는 문자를 받기도 하고,
또 어느 해는 일일 호프를 한다고 문자가 오기도 하였다.
엄마는 동생이 볼모로 있기에 주기적으로 헌납하셔야 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은 꽤 많이 있었다.
그렇다고 시설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다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일부분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
신념을 가지고 이용인들을 대해 주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이 계셨다는 것은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다.
아직도 동생에게 잘 대해주셨던 담당자분들이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다.
어느 하루는 내가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난데없이 꿈에 동생이 나타났었다.
꿈에서도 동생은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멍하니 처다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생전 동생은 내 꿈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날이 주말이었다. 나는 계획도 없이 엄마에게 꿈이야기는 하지 않고,
동생이 있는 시설에 보호자가 간다는 사전 약속도 없이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착을 하니 동생은 몸무게가 엄청 빠져 있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한 것 같았다.
장을 넣는 수술을 한 후 거의 10년 정도를 동생은 장협착과 설사로 고생을 했는데
장협착으로 병원 입원을 자주 했던 터라, 시설에서 밥 먹는 양을 엄청 줄였던 것이었다.
아사직전이었다.
못 먹어서 그런지 동생은 평소보다 침을 더 많이 흘렸고, 할 줄 아는 말들도 거의 못했다.
동생을 차에 태워 엄마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기를 사 먹였다.
동생은 고기를 마셨다.
마시고 싸고를 반복하고, 화장실에 왔다 갔다를 몇 번씩 반복했다.
그 후 2달 정도 집에서 동생 몸 회복시키는 것에 집중했었다.
몸이 좋지 않으니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물고 때 쓰는 것도 하지 못했다.
2달쯤 엄마의 간호 덕분에 동생은 몸무게를 어느 정도 회복했고,
다시 집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물고 때 쓰는 것도 함께 시작했다.
"저 지랄 맞은 버릇만 좀 나아지면, 같이 살수 있을 텐데... 내가 데리고 살 텐데..."
라고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