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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08. 2024

 식사 시간은 언제나 내전 중

다이어터가 좋아할 만한 식사 환경?

외할머니의 금비녀. 금반지의 서러움을 간직한 집과 가내수공업용 공장은 매 끼니를 해결하기에 적합하지가 못하였다.  

부모님은 한 손으로는 얇은 쇠판을 나머지 한 손으로는 동그란 기계를 돌리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셔야 했다.

일일이 손으로 기계를 돌려야 하는 작업의 연속이라 불규칙적으로 금속프레스 기계소리가 나지 않으면

어김없이 "밥때" 였었다.

          

엄마는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공장오빠 몇 명과 같이 공장에서 일하시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가면

공장에서 나오셔서 우리 방 앞에 딸린 조그마한 부엌으로 가셔서 곤로에 불을 붙이시고, 밥과 국을 하셨다.    

겨울을 제외하면 곤로를 밖으로 꺼내서 밥을 하셨다.

겨울에는 바람이 불면 곤로에 불이 꺼지기 때문에 방안 가득 곤로의 매캐한 냄새가 

밥과 국보다 먼저 입속에 들어와 있었다.  

아마 "응답하라 1988" 덕선이 집의 하위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실 것이다.

딱 그렇게 생겼었다. 그나마 지하인 것을 제외하고는 그때의 우리 집에 비하면 드라마 속 덕선의 집은 궁궐 수준이다.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 같은 곳이 있고,

아이 걸음으로 한두 걸음 앞으로 걸어가면 보루코로 대충 쌓아서 만든 단이 있었다.

거기를 발고 올라서야지 방문을 열 수가 있었다.

           

방 안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었기에

밥을 먹는 곳은

이사 온 후 응급으로 만든 집 앞 판자 평상!

봄. 여름. 가을 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겨울은 평상 위에 상을 놓고 밥을 놓으면 너무 추워서

밥이랑 국이 바로 식어버린다.

그 시절의 겨울은 왜 그리도 추웠을까?  아직까지도 나는 겨울을 싫어한다.

겨울에 담요를 둘둘 말고 밥을 먹어도, 너무 추워서 어린 시절의 나는 자주 체하기 일쑤였다.               


나와 엄마 동생은 밥 먹을 때 2부 조였다. 오후반!     

평상이 좁아서 다 같이 먹을 수가 없어서, 나랑 동생, 엄마는 항상 뒤에 밥을 먹었다.

이 시절에는 학생수가 너무 많아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도 오전 오후반이나 1부 2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끼에 대략 8~9명이었다.

장남인 아빠는 할머니의 많은 빚과 함께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셨고

결혼하지 않은 삼촌 두 분도 근처에 사셔서 매번은 아니지만 자주 같이 밥을 먹었다.

그 "밥때"를 매일 3번씩 30살도 되지 않은 엄마는 어떻게 견디셨는지 모르겠다.


살던 집 옆에는 낮은 담이 있었고 시골이라 공터가 많이 있었는데  

공터에서 엄마는 텃밭을 가꿀 수밖에 없었다.  

강제 가드닝....

시장은 멀고 밥은 매 끼니 해야 되니, 밭에서 나는 식물과 풀떼기들이 자라기가 바쁘게

식구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살 때 나는 밥 먹는 시간이 너무너무 싫었다.

동생, 엄마와 같이 밥을 먹으면  동생은 수저질을 하지 못했기에 매번 떠먹여 주고

그것마저도 잘 받아먹질 못하고, 밥 먹기를 거부하고 밥숟가락과 그릇등을 던지기도 하였다.

온 평상과 밥상이 밥풀과 음식들로 가득하였다.

동생 밥은 엄마가 안아서 거의 억지로 떠먹였고, 엄마는 동생을 나은 죄로

항상 밥을 국에 말아 마시기를 끼니마다 반복하셨다.  


아빠는 3남 2녀의 장남이셨다. 아빠의 막냇동생이자 나의 막내 삼촌...

어려서 기억은 거의 나지 않지만, 무척 인자하시고 착하셨다고 아빠 형제 중에 제일 사람답다고

엄마가 늘 말씀하셨다. 막냇삼촌만이 엄마의 밥상 전투의 전우였으며,

자신과 함께 동생을 사랑하고 안쓰럽게 여겨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주위에서 동생의 장애를 인지하면서부터 동생에게는 늘 폭력이 따랐었다.

가족들의 폭력...

보이지 않는 이웃들의 폭력...   모르는 사람들의 폭력

   

4.5살 동생은 말을 거의 못 했고, 신음소리로만 의사표시를 하는 수준이었다.  

자기가 맘에 들지 않거나, 자기에게 만만하거나

혹은 이유도 없이

침을 흘리면서 물기를 하루에도 몇십 번을 반복했다.

동생의 "물기"는 자기를 방어하고 의사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많이 물려본 사람으로서  감히  말할 수 있다.

너무 아프다! 눈물 콧물이 쏙 빠지게 아팠고

흉터도 남아있다.


그래서 밥을 먹이는 것도 엄마의  전우이신 막냇삼촌 말고는 할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삼촌 역시도 동생에게 많은 물림을 당하셨는데

동생에게 물려도 아프다는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고...

엄마가 밥을 먹이거나, 막냇삼촌이 일이 있으셔서 매번 밥상 전투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내삼촌이 계실 때면 동생을 따로 데리고 가서 엄마가 밥을 마시지 않으시게, 동생밥을 밥을 먹여주셨다.


그러나 그다음 해에 엄마의 유일한 밥 전우였던, 막내삼촌은 음주오토바이 뻉소니로 돌아가셨다.

막내삼촌이 25도 안된 나이였었다. 그리고 삼촌에게는 결혼을 앞둔 분도 계셨었다.    


어느 늦가을쯤으로 기억된다.

아빠는 유난히 국수를 좋아하시는데 시내에 나가셔서 횟거리를 조금 사 오셨다.     

회를 넣고 비빔국수를 하고 식탁 대용 평상에서 좀 떨어져 곤로 위 냄비에 멸치 다시물로 국물을 만들고 있었는데 동생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곤로를 건드리면서 넘어져서 크게 데인적이 있었다.      

그 후  년간은 우리 집은 국수를 먹지 않았다.

동생의 팔에는 아직까지 희미하게 그때의 상처가 남아있다.

              

내 어린 시절의 끼니의 기억은 곤로의 매캐함과 함께

언제나 밥 먹기 싫어서 소리 지르는 동생 소리로 가득했다. 나도 엄마와 같이 밥을 마셨다.

동생 곁에서 빨리 떨어지기 위해서...

지금은 밥을 빨리 먹을 필요도 없는데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역시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

곤로-옆에는 항상 불소시계용 신문지와 성냥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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