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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14. 2024

도사견 feat 유산균

요구르트에 걸린 운명

가족이 살던 그곳은  많은 낯선 이들의 "극단적 선택"의 종착지이기도 하였다.

왜 그 많은 이방인들은 우리가 살던 그곳으로 와서 마지막을 보냈을까?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나무에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국민학교도 가지 않았던 나는 무엇이든지 엄마에게 제일 먼저 묻곤 했다. 

"엄마 저기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던 어린 나는 처음에는 그저 신기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엄마는 축 늘어져 있던 이방인을 보시고는 나를 자기 쪽으로 돌려 더 이상 보지 못하게 하셨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의 배에 파묻히게 되었다.


논밭이 많았던 탓에 진한 갈색의 다 쓴 농약병은 논이든 밭이든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느 한날은 농약을 드시고 동네 아저씨가 리어카에 실려 나가는 것도 보았다.

아저씨가 실려있던 리어카에는 자주 보던 농약병과 

썌하고 독한 냄새가 아직도 나는 것처럼, 냄새의 추억과 함께 강렬히 남아있다.


그 동내는,  없어도 너무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가난 집성촌 같은 곳이었다. 우리 가족 역시 그곳의 일원이었다.


우리 집은 이사 가던 다음 해가 되어서야 조그마한 냉장고를 드디어 구매하게 되었다. 

아빠가 우리 집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조금 한 오토바이에 

냉장고를 싣고 집으로 오시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나는 그 하얗고 맨질맨질한 작은 냉장고가 정말 미치도록 좋았다. 

얼음을 마음껏 꺼내 먹을 수 있고, 더 이상 냉장고 없다고 동네 오빠로부터 무시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국민학교 1학년의 나는 선생님의 말을 잘 들는 척하는 아이였다. 

선생님의 말씀은 곧 법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생님은 자기 물건에는 무조건 

견출지에 연필로 이름을 써서 붙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이 냉장고를 보는 순간 생각이 났다.

냉장고 앞으로 가서 연필로 이름을 썼다. 써지지 않았다.

견출지에 이름을 써서 붙였더니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가내수공업 공장장의 딸이었다.

공장을 어슬렁 거렸다.

공장 바닥에 널러있는 것 "못" 이였다.

냉장고에 이토록 이름 쓰기에 적합한 물건이 있었던가!!!

나는 그 큰 녹슨 못으로 윗냉동고 칸에 아주 크게 "1-7반 OOO"

못으로 있는 힘껏 긁어서 내 이름을 썼다. 

아무도 냉장고를 훔쳐가지 못하게...

뿌듯했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아빠가 먼저 아셨다.

새 냉장고에다 못으로 긁었으니 아빠는 당연히 화를 내셨다. 나는  진짜 크게 울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혼날 이유도 없는데 야단을 치는 아빠가 미웠고, 서러웠다.

야단치는 소리와 나의 우는 소리에 엄마가 공장에서 나오셨다.

엄마는 왜 이름을 못으로 쓰게 됐는지를 물었고, 

나는 선생님이 물건에는 이름을 쓰라고 해서 연필로는 써지지 않아 못으로 썼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내편이었다. 

애가 몰라서, 냉장고가 너무 좋아서 그러는데 왜 애를 야단치냐고 도리어 아빠를 나무랐다.

엄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일 무이한 나의 편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냉장고는 거의 15년간 "1-7 OOO" 녹슨 이름표를 달고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커서 이 사건에 대해 엄마한테 물어보니 엄마도 냉장고에 못으로 이름을 써서 많이 당황하셨다고 하셨다.


아빠가 가끔 시내에 나가시면 조그마한 오토바이를 타고 가셨다. 

갔다 오실 때면 언제나 엄마가 부탁한 식재료, 생필품들 과자 그리고 꼭 요구르트를 한 봉 지식 사 오셨다.

그 동네는 지금은 흔한 슈퍼하나 없었다. 

아빠가 가끔 사 오시는 새우깡이나 초코파이 그리고 요구르트가 간식의 전부였다. 

엄마는 나와 동생의 간식을 다른 식구들이 먹을까 싶어서, 

엄마만 알고 있는 높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으시고는 동생과 나를 불러서 몰래 먹이셨다. 

식구는 많은데 그 많은 식구들의 간식까지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은 요구르트 한병식을 나와 동생에게 주셨다. 

그날도 나는 아껴먹으려고 뒤에다 구멍을 뚫어 조금씩 쪽쪽 빨아먹고 있었는데,  그 뒤로 시간이 꽤 지났는데 동생과 요구르트는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려 하고 있어서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동생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그곳은 밤이 되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까지 동생을 찾아야만 했다.


동내가 좁았던 탓에, 오래지 않아 동생을 찾았다.

동생이 있던 곳은 개집 안이였다. 동생은 요구르트를 개와 사이좋게 한입씩 나눠 먹고 있었다.

그 시절 개 식용이 자유로웠고, 그곳은 투견과 육견 목적으로 교배시킨 일명 도사견들의 사육장이 있었다.

게다가 동생과 요구르트 동지인 그 개는 새끼를 낳은 지 며칠 되지 않아 경계심이 최강이었다.

도사견의 새끼들은 이미 동생이 견사 밖으로 다 빼내어 놓았었다.

신기하게도 밥을 주던 주인도 몇 번이나 물렸는데, 동생 앞에서는 온순한 애완견이었다. 

누구도 견사 안으로 들어가서 동생을 데리고 나올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저 애타게 동생이름을 불렀다.

나오라고.. 엄마랑 좋은 곳에 놀러 가자고.. 요구르트 집에 많이 있다고.. 가져가서 어미개와 먹으라고...

한참 있다 동생이 엄마의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요구르트가 떨어졌는지 조금 후 견사 밖으로 나왔다.

개주인도 몇십 년 개를 키우면서도 처음 보는 일이라고 했다.

동생은 정말 큰일을 치를뻔했다. 

엄마는 동생을 씻긴 후 긴장이 풀리고 힘이 빠져서 쓰려졌었다.

거기에는 수십 마리의 사나운 개들이 있었는데...

나도 너무 무서워서 잘 쳐다보지도 못한 채 아주 멀리서 동생이 빨리 나오기만을 바랬었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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