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하겠다는 아이에게서 배운 것
아이는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다.
교육과정이 달라졌다. 대학을 가려면 내신도, 세특도, 수능도 모두 중요하다고 한다.
아이로부터 공부에 욕심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같이 잘 해보고 싶은 의욕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동안 공부 안 시킨 것은 잊었다. 오히려 그간의 공백을 채우려는 듯 아이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엄마의 직업 정신이 발동했다.
과학은 직접 가르쳤고, 갈고 닦은 실력으로 보고서도 써주고, 수행평가도 빈틈없이 준비해주고 싶었다.
여태 제대로 공부해본 적 없는 네가 갑자기 시작하려니 얼마나 막막하겠니.
플래너 쓰는 습관부터, 월간 계획표, 암기 과목 정리 방법까지,
하나하나 전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아이 옆, 책상 옆에 밀착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나는 완벽주의자다. 목표를 정하면 직선으로 달리고, 한 가지에 꽂히면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세특을 위한 보고서 작성은 솔직히, 즐거웠다.
질문을 만들고, 자료를 수집하고,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나의 새로운 취미에 가까웠다.
'내가 열심히 도울게. 너도 최선을 다해봐.'
우리 이렇게 한 팀을 이루어 고등학교 성적을 찬란하게 만들어 가보자고 생각했다.
아이도 그럴 마음일 거라,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 고사를 치르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제 공부든, 수행평가든, 보고서든 내가 혼자 알아서 할게."
당황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한다 싶었다.
전투태세를 갖춘 채로 앞으로 나갈 준비를 다 마쳤는데,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야?
'스스로? 니가 스스로 어떻게? 너...할 줄... 알아? 니가 엄마가 하는걸 못 봐서 그러나 본데, 시간도 엄청 걸리고 어려워.'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쨋든 스스로 한다는 말은 좋은 말이니까.
“그래, 네가 스스로 해.
그런데 엄마가 도와주면 훨씬 쉬울 거야.
엄마가 해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네가 엄마를 시키는 걸로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네가 엄마를 시켜!
그게 스스로 하는 거지, 뭐.
엄마가 먼저 나서진 않을게.
그렇게 시킬 줄 아는 것도 능력이야.”
하지만 아이는 확고하다.
“아니, 엄마, 이제부터는 내가 할게.
엄마가 도와주면 솔직히 편해.
근데 엄마가 만든 보고서로 발표할 때,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
내가 한 게 아니니까.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갖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해보려고.
엄마가 그동안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지 잘 알아.
그런데 엄마가 계속 그렇게 도와주면
내 힘으로 하는 법은 영영 못 배울 것 같아.
이제는 혼자 할 때야.”
'내가 보고서를 얼마나 잘 쓰는데..'
'보고서 쓰는거 정말 재밌거든? 내가 요즘에 태어났으면 나는 딱 수시 체질이야. 정말 수시로 대학 갔을 거야.'
나를 두고 활용하지 않는 아이가 답답하고, 참 요령없다 생각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않는 것 같아 못마땅했다. 공부하는데 일분일초가 아깝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네가 공부에 욕심이 생겼다고 했지만, 그동안 해온 공부가 남들보다 모자란데, 남들보다 2배씩 빨리 뛰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채찍질하고 싶었다.
급기야 '정말 잘할 마음은 있는 걸까?'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무엇보다,
이 재밌는 보고서 쓰기를 하지 말라니...
나로선 적성에 딱 맞는 걸 찾은 참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보고서로 발표할 때 마음이 불편했다는 아이의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존중해주고 싶었고, 그 불편함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하겠다'는 아이의 결정을 받아들어야 한다 생각했다.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더 쉬운 길 대신, 양심과 성장의 길을 택한 아이가 기특했고, 무엇보다 감사했다.
그런데, 문득 초등학교 3학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아이는 '스스로' 했었다.
나는... 또… 같은 실수를 하는 건 아닐까?
목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첫째 아이.
그때는 너를 잘 챙겨주지 못해 늘 미안했다.
결국 정시러의 길을 택한 딸.
둘째를 통해 미안함을 조금 만회해보려 했지만, 아이들은 내 예상보다 훌쩍훌쩍 자라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