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학원에서 아이를 데려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함께 집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아이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엄마, 나는 평생 공부를 잘하고 싶단 생각 안 하고 살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나, 공부 욕심이 생겼어.”
순간,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상상도 못해본 말이었다. 믿기지 않아 되묻고 싶었고, 얼떨떨하면서도 기쁨이 주체되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기뻐하면 한 발 뺄까, 그 말이 반갑고 소중해서, 나는 애써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
“그래? 정말 기분 좋은 말이네. 넌 노력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아이야. 엄마가 많이 도와줄게.”
아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엄마, 난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정말 안 했어. 그땐 공부를 해도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공부를 더 안 하게 됐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욕심이 생겨.”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이야. 이제는 너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을 먹었으니까, 얼마든지 잘할 수 있을 거야.”
아이는, 어쩌면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세계 앞에서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을 스스로 체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공부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이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엄마, 왜 중학교 때 내가 그렇게 PC방 다닐 때 혼내지 않았어?”
나는 그 질문에 멈칫했다.
‘안 혼냈다고?’
가끔 화도 냈고, 꾸짖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이는 기억하지 않는걸까?
아이의 중학교 시절은 PC방과 가까웠다.
처음엔 몰래 다니다가, 중3이 되자 ‘하루 2시간’으로 스스로 시간을 정해놓고 다녔다.
아마도 내가 PC방 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나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이는 ‘LOL’ 에서 꽤 실력을 인정받는 플레이어였고, 같이 게임하자며 친구들이 줄을 섰다고 했다.
“엄마는, 네가 매일 게임을 하면서도 2시간씩 딱 정해놓고 절제하는 모습이 오히려 대견했어.
솔직히, 더 오래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절제하지? 싶었거든.”
지금 생각하면 나도 이상한 엄마였다.
누군가에게 “우리 아들은 매일 PC방 가는데 딱 2시간만 하고 온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 적도 있었으니까.
아이는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엄마는, 나를 믿었던 거야?”
믿었다는 말. 머릿속에 맴도는 그 단어 앞에서 나는 잠깐 멈칫했다.
‘정말...내가 믿고 있었던 걸까?’
질문은 짧았지만, 내 마음 속에 파문처럼 번져갔다.
생각들이 엉키고, 감정이 허둥댔다.
최근 들어 받은 질문 중 가장 낯설고, 가장 깊숙이 흔들리는 질문이었다.
무슨 대답이든 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입술은 무겁고 마음과는 따로 놀았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빈 채,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어, 내가 믿었던 건가? 믿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그게... 믿음이었을까?
솔직히 네가 PC방을 자주 가는 게 걱정이 되긴 했어.
그런데 엄마는 너가 어떤 선은 넘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그래서 지켜볼 수 있었던 거야.
그래... 생각해 보니까 알겠다.
엄마는, 너를... 믿었던거야"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걸
나는 너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매일같이 게임을 해도,
결국 너는 너의 길을 걸을 아이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것을, 나보다 먼저 네가 알아봐 준 거구나.
그렇게 우리 사이의 오래된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장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열리고 있었다.
믿음은 언제나 평화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 사이엔 새로운 긴장과 성장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첫째가 고2, 고3으로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공부 문제로 수없이 부딪혔다.
사춘기의 벽과 부모로서의 한계 사이에서,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도 깊었다.
첫째는 내 성장의 나이테이고, 삶의 한 축이자, 내가 가장 오래 사랑해온 존재였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엔 애정과 기대, 걱정과 미련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믿는다’는 감정이 내 안에서 선명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믿음이, 조용히 첫째에게도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 아이도 그 믿음을 읽어낸 거 같다.
그때부터 서서히 갈등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믿음은 그렇게,
서로를 겨누던 긴장마저도 품어 안으며 우리 삶을 조금씩 바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