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때매 고생깨나 했지만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by 바다와강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이 감독하고, 박찬욱, 정서경이 함께 극본을 쓴 영화로 2022년에 개봉되었다. 박해일과 탕웨이가 주연을 맡았고, 개봉 당시 190만 정도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202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며 박찬욱이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사건을 수사 중인 형사 해준(박해일 역)과 죽은자의 아내 서래(턍웨이 역). 이야기는 해준이 서래에게 의심과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그 둘의 미묘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미스터리 로맨스물이다.


서래는 중국 출신 이민자로 한국어에 서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한국말은 독특한 울림을 준다. 부사어 "마침내"와 형용사 "단일한"은 그녀의 입을 통해 발화될 때 낯설고도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해준을 사랑하고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자 그와 '헤어질 결심'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서래. 그러면서도 그녀는 끝끝내 해준을 잊지 못한다. 그녀의 쓸쓸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어눌한 한국어와, 정훈희의 〈안개〉 라는 노래에 얹혀 아득하도록 오래오래 진한 여운을 남겼던 기억이 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할머니 폰 바꿔 드렸어요, 같은 기종으로. 전혀 모르고 계세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사랑 때문에 형사로서의 품위를 잃고 만 해준. 해준은 그녀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서래에게 휴대폰을 버리라고 지시한다. 증거를 없애라는 남자의 지시는 여자에게 가장 뜨거운, 그러나 절박한 사랑의 고백으로 들렸으리라.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너무 좋아 듣고 또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목소리. "사랑한다"가 아니라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그러나 자신 때문에 붕괴된 남자와, 그 모습을 보기 힘들어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며 그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죽음을 선택한 여자. 여자가 죽음으로 그를 떠났으니, 이제 남자는 어쩌나. 사랑을 안고 죽은 여자와 헤어질 수도, 헤어질 결심을 수도 없을 텐데...


아, 됐고…… 가인이한테,
너때매 고생깨나 했지만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 주세요.


위의 인용은 해준이 해결한 살인사건의 가해자 산오가 자살 직전, 해준에게 남긴 말이다. 사귀던 여성이 결혼하며 연락을 끊자 산오는 2년간 집요하게 수소문해 기어코 찾아내 그 남편을 살해한 후 경찰이 추적해 오자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영화의 아주 작은 부분으로 영화를 본 관객 대부분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사건은 극중 뉴스로도 전해지고 이 뉴스를 본 서래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사랑은 용맹한 행동이다.


잠깐 스쳐지나간 산오와 가인의 에피소드지만 난 이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해준과 서래의 사랑 역시 이 사건과, 이들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해준도 서래도 금기의 사랑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서로가 없었다면 훨씬 더 공허하지 않았을까. 늘 불안과 긴장 속에 불면했던 해준에게 서래는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집중하게 했던, 미치게 했던 존재였으니 말이다.


사랑은 공허를 채우기도 하지만 더 많은 시간 사람을 공허하게 만들기도 한다. 날 일으켜세우기도 하지만, 날 붕괴시키기도 한다. 용기내어 만날 결심을 하지만,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죽음 직전 "너때매 고생깨나 했지만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라고 선언할 수 있다면, 가끔 공허하고 때로는 붕괴될지라도 사랑하는 것이 낫다. 사랑은 용맹한 행동이니까.


이 글을 쓰는 내내 내 귓가엔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른 노래 〈안개〉가 자동재생되었다. 몇 년 전 극장에서도 이 노래 때문에 엔딩크레딧 때 쉽게 일어서지 못했었다. '단...' 기타소리로 시작해 정훈희의 무심한 한 소절이 끝나면, "그 언젠가 다정했던~", 툭 떨어지는, 송창식의 낮고 궁글린 목소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 그 느낌 때문에 '마.침.내.' 다리가 풀렸던 기억.

아아~ 오늘 아침엔 오랜만에 커피 대신 노래로 공허를 메워본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아 아아아아아~ 아아 아아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https://youtu.be/gpi6jrdgK3A?si=TU_gh7mWRB4b3Tfj


#헤어질 결심 #사랑 #안개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