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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Mar 24. 2022

지난 한 달

취준생으로서의 첫 걸음

'정신없다'란 수식어가 어느때보다 잘 어울렸던 지난 한 달.

3년간 굳혀온 고시생으로서의 정체성을 한번에 벗어던져버리고, 취준의 세계를 더듬더듬 탐색하는 시간이었다.

시야가 확 트인 느낌이다. 고시공부할 때는 내가 왜 외교관이란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되뇌이며 의도적으로 다른 길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산업들과 기업들이 있다. 그들은 제각기의 방식대로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사회공헌적 가치를 창출한다.

즉, 국가의 이익을 향한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공무원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나는 기업인이 됨으로써 내 꿈을 더 잘 이룰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제는 외시 1차, 붙여준다 해도 2차 준비 안할 것이다. 나라는 사람에게 외교관이라는 옷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기업인의 옷을 멋드러지게 입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취업 준비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학교에서 열어주는 취업특강은 대부분 참석했다.

자소서, 면접 등에 써먹을 이야깃거리들을 추리기 위해, 그리고 내가 걸어온 삶의 길을 파악하기 위해 '경험리스트'를 작성했다. 의외로 많은 것들을 해 왔다. 설령 취업용 스펙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공무원 준비하다 포기했으니 공기업에 갈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내가 의외로 사기업에 더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 사기업 가리지 않고 지원하되,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강점인 외국어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직무/산업을 노리기로 했다.

공기업 직렬 선택과 사기업 직무 선택이 생소하여 선배님들께 컨택하여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연락드린 선배님들이 흔쾌히 도움을 주셔서 방향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었다.

메타버스 채용박람회에도 참석했다. 두 차례에 걸쳐 몇십 개의 기업에서 와 주셨다. 부족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스토리를 만들고 역량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들었다. 현직자와의 상담이라는 기회 그 자체가 귀중했다.



직업가치관 검사를 통해 나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알아보기도 했다.

업무의 성격 측면에서 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할 수 있는 일을 선호한다. 협력에서 창출되는 시너지에서 희열을 느낀다.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서 일하면 일할 의미를 찾지 못할 것 같다.

또한 내 인생에 있어서 결혼과 육아는 빼놓을 수 없는 가치다. 이와 관련된 복지가 잘 되어있지 않고 순환근무가 지나치게 많은 곳은 되도록 배제하는 것이 좋겠다. (이쯤되니 외시 왜 준비했는지 의문이 든다.. 아마 준비할 당시에는 '붙고 고민하자' 라며 생각을 피했던 것 같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오픽, 토익, 컴활을 신청했다. 오픽은 이미 쳤고, 토익과 컴활은 다음주에 칠 예정이다. 이 세 가지는 범용성이 가장 넓은 자격증에 속하므로 취준 초기에 미리 확보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오픽은 유튜브를 보며 꿀팁 몇 가지 배우고, 길 가면서 중얼중얼 연습하는 식으로 대비했다. 다행히도 AL을 받았다.

학교 국제경영학회에 가입했다. 스물다섯이라는 취준생치고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학회에 들어가기 망설였는데, 이제부터는 소속 집단에서 막내이길 바라는 마음은 버리기로 했다. 예상대로 신입기수 중 내가 제일 연장자였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진 않다. 학회의 커리큘럼이 체계적이어서 많이 배우고 있다. 5 forces니, 4p니, swot이니 지금까지 안해본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며 하고 있다.

잠시나마 알바도 해 보았다. 내가 단골로 자주 가던 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주방보조 일을 했다. 물론 인턴 붙는 바람에 일주일 만에 그만뒀지만... 몸으로 부딪히며 일하는 재미를 잠시나마 느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내일부터 인턴 근무를 하게 되었다. 지원서 내는 경험한다 생각하고 인터넷 검색해가며 영어 레쥬메와 커버레터를 작성했는데, 감사하게도 나를 좋게 봐 주셨던 모양이다. 전화로 서류 합격 통보를 받고 2시간 후에 화상 면접이 잡혔는데, 그 2시간이 3월 한 달 전체 중 가장 밀도 있게 보낸 시간이었다. 급하게 회사 정보 찾아보고 외우고, 이력서와 자소서 검토하고, 1분 자기소개 만들고, 스터디룸 예약하고... 내가 일하게 될 곳은 싱가포르개발은행(DBS) 서울 지점으로, 복학 전까지 5개월 간 일하게 되었다. 드디어 나도 회사 조직을 경험해보는구나. 단순한 업무를 하더라도 그로부터 파생되는 더 큰 업무에 대해 공부하고 향후 커리어를 개척하는 데 조그마한 인사이트라도 얻어갈 수 있게 해야겠다.



그리하여 올 1년의 스케줄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8월 말까지는 인턴과 학회를 병행하며 틈틈이 자격증을 딸 것이다. 토익, 컴활 이외의 자격증 취득도 노려볼 것이다. 무역 관련 자격증을 생각 중이다.

9월에는 복학하여 학교 수업과 학회를 병행하며 하반기 공채를 지원할 것이다. 14학점이 남아서 결코 쉽지 않겠지만, 고시한 업보라 생각하고 감당해야한다.



오늘 재학증명서를 떼러 학교에 잠시 다녀왔다.

캠퍼스를 걷는데 문득 "아 이게 여유구나" 싶었다. 고시공부할 때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여유였다.

산책을 하든 수다를 떨든, 고시생일 땐 공부 이외의 활동은 '일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존에 일탈이었던 것이 '일과'가 되어있다.

재학증명서 떼기, 은행 가기, 중고서적 팔기 등과 같은 작은 일들을, '공부시간을 빼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주요 일과로 삼아도 괜찮게 되었다.

이것이 내 일상에 있어 가장 큰 변화이자, 가장 반가운 변화다.

공부만이 유일한 '합법적' 일과였을 때, 나는 언제나 수준 미달이었다. 더 공부해야 하는데 못한 수준 미달의 고시생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았다. 그러니 안 맞지. 그러니 스트레스 받지.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는 제법 괜찮게 살아가고 있는 취준생이 되었다.

진작에 고시 때려칠걸 하는 생각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3년의 고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행복이 더 달콤한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지난 한 달은 꽤나 어질어질했지만, 꿈처럼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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