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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Nov 12. 2022

그림 부수기

첫번째 그림은 대개 파괴되기 마련이다.

어제는 슬픔을 넘어서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머리를 치고 지나간 것 같은 하루였다.

우리 과 교수님의 부고 소식을 받고 급하게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던 중, 이번주에 본 면접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친구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기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교수님을 보내드리는 슬픔, 불합격에 대한 슬픔 - 결도 다르고 급간도 달라, 눈물을 애써 참고 머릿속에서 불합격 소식을 지워버렸다.

저녁 때는 학회 발표가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까지 안 좋아졌다.

그럼에도 발표를 안할 수는 없었다. 힘든 몸을 이끌고,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꾸역꾸역 진행한 발표는 스스로도 참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기를 조금은 유보하고, 하루종일 나를 억눌렀던 족쇄 같은 하루였다.



솔직히 떨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은 요만큼도 없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회사였고 많은 노력을 쏟아부은 것은 맞지만, 면접 과정에서 상처라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질문이 아예 주어지지 않았고, 내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한 질문 위주로 받았다.

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내가 한 말은 거의 대부분 중간에서 잘렸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어떻게 보여드릴 수 있다는 건가. 의문과 상처만 남는 면접이었다.

불합격은 예상한 수순이었다.

그래도 억울하진 않다. 내가 마음에 안 들었다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토를 달 이유가 없다.



올초 고시를 포기하고 나서 나는 그야말로 쉬지 않고 달려왔다.

바로 인턴 지원을 시작했고, 3월 말부터 일을 시작했다.

5개월 간 인턴과 학회, 고시반, 자격증 공부를 병행했다.

8월 말 퇴사 후, 바로 복학함과 동시에 하반기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학회와 고시반 일 병행까지.

그렇게 지금까지 온 것이다.

취업준비는 생각보다 잘 풀렸다. 

절반 가까이 서류 합격을 했고, 가장 가고 싶었던 두 회사는 면접까지 갔으니 말이다.

얼렁뚱땅 운좋게 좋은 곳에 취업하는 내 모습을 그려왔던 것 같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행을 바랐던 거지.

어림도 없었다. 전부 다 떨어졌고, 2차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2차전을 시작할지 말지에 대해 하루종일 고민했다.

빨리 취업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도, 잠깐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고민의 답은 정해져 있다.

채용시장은 갈수록 한파가 불고 있고, 지금 남은 기회를 최대한 잡는 게 맞다.

지금부터 취준을 쉰다고 해서 마음이 편할 것도 아니니까.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이제부터는 좀더 겸손한 마음으로, 더 많이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충분히 시간 들여 자소서를 작성해보려고 한다.



삶이 생각한 대로 잘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그린 그림은 대개 깨진다.

이번에도 내가 허영심을 물감 삼아 그려본 "빠르게 취업하는 나"의 그림은 무참히 깨졌다.

그 그림을 깨뜨리는 것부터가 성장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감사하다. 도리어 마음이 가볍다.

11월 중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요행을 바라기보다 삶의 어려움을 그대로 느끼고 감당하며 한 걸음씩 겸손하게 내딛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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