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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Jul 29. 2021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0. 들어가며 - 제 MBTI는요



학계의 질타를 받지만 재미로 널리 애용되고 있는 MBTI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MBTI 검사에서 일관되게 ENFJ가 나왔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ENFJ의 특징만 죽 읊어줘도 나를 어느 정도 파악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찐엔프제'다. 



ENFJ의 가장 큰 특성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굳이 MBTI를 끌고 오지 않더라도 나를 잘 아는 가족과 친구들이 나의 큰 장점으로 꼽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성격적 특성들 중 하나를 넘어 내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사람'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그럼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흉악범죄자는? 내가 감히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랑의 정의를 넓게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 내 생활 반경을 벗어난 사람들은 논의의 범위에서 제외하면, 나와 인간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옅은 사랑의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고 환대하며, 상대방이 허락한다면 나도 그의 삶 안에 들어가 내가 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주고 싶어하는 열망"을 말한다. 누군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기본적으로 이 마음으로 상대를 대한다. 나는 당신과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어나가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다. 여기에 상대방이 응답이 없으면 관계를 단념하지만, 상대만 오케이한다면 관계를 위한 작은 노력들을 해 나간다. 그래서 그런지 깊은 1:1 관계의 지인들이 남들에 비해 많은 편인 것 같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은 상당히 양면적이다. 나를 위해 사랑할 수도 있고, 상대를 위해 사랑할 수도 있다. 상대방과 어울리는 것이 나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 위함도 있고, 반면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이 없어도 그 사람 자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보통은 전자만의 감정으로도 사랑을 느끼지만, 가끔 후자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내가 이런 사랑도 할 수 있었구나" 하고 놀라게 된다.




2. 사랑이 상처가 되어 돌아올 때의 대처 방법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삶과 나의 삶이 중첩됨을 수반한다. 자신의 삶을 100%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상대방과 융화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과 합을 맞추려고 하다 보면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그 관계에 자신의 욕구를 많이 투영하게 된다. 절제되지 않은 욕구를 상대에게 강요하고 그것이 대책없이 커지면, 정상적인 관계맺기는 폭력으로 변질된다. 폭력에는 육체적 폭력뿐 아니라 정서적 폭력도 포함된다. 폭력은 굉장히 나쁜 사람들만이 저지르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폭력적이다. 자신의 폭력성을 인지하고 관계에서 발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면 상처받고 폭력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에 노출된다. 물론 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깊은 관계에서는 상처를 아예 안 받는 경우가 더 드물다. 관계가 주는 상처가 누적되면 사람을 기피하게 된다. 이런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사람과 어울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ENFJ가 한국에서 제일 적은 유형인 이유가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가 누적되자 사람에게 마음을 덜 주게 되면서 다른 성격유형으로 바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케이스가 적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칠 수도 있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큰 상처를 받은 적도 많고,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적도 몇 번 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사람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마음껏 사랑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이 주는 상처를 내가 받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나를 아프게 하는 말과 행동을 다 덥썩덥썩 받아물고, 담아두고 곱씹었다. 그런데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맺으려면 상대를 위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본질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규정될 수 없고, 상대방에 의해 내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에 의해 전혀 영향받지 않을 순 없겠지만, 나에게 오는 부정적인 영향은 얼마든지 최소화할 수 있다. 연습이 필요할 뿐이다.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주려고 준 것이 아니더라도, 서로의 차이 때문에 힘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상대 기준에서는 웃자고 한 말이 내 입장에서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 될 수 있다. 상대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연락 주기가 내 입장에서는 너무 느리거나 빠르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을 나와의 '관계 맥락'에서 분리하여 상대방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도움된다. 나의 경우 호칭을 떼고 그 사람의 이름을 되뇌이는 것이 도움되었다. 예를 들어 이모라고 하면 "우리 이모 김00"이 아니라 "인간 김00"으로 불러보는 것이다(상대한테 말고 혼자서만). 나와의 관계와는 결이 다른 그 사람만의 고유성이 있고, 그것이 나와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하나의 사실로 인정하면 된다. 또한 내가 누군가를 대할 때 완벽하지 않듯이 그 사람도 실수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너무 서로 간에 100점짜리 기준표를 들이밀지는 말자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이유는 상대방과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생각할 때 상대방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역설 때문인 것 같다. 이 역설을 제대로 깨닫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나를 지킨다는 과제, 어렵지만 연습하고 있다.




3. 뜻밖의 휴식



몸은 멀게, 마음은 가깝게였나? 대중매체에서 지겹도록 접한 사회적 거리두기 슬로건이다. 상당히 이상적이다. 차라리 진리의 '몸멀마멀(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이 현실과 더 부합한다. 그래서인지 코시국에는 기존의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도, 새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도 여러모로 힘들다. 사람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겐 최악의 여건이다.



그래도 마냥 나쁘기만 한 상황은 아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애착, 헌신만 알던 내가 분리를 경험하고 고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관계에 불을 지피기보다는 잠시 불을 끄고 휴식을 취해보는 것, 나에게 정말 필요한 연습이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약속이 취소되는 등 인간관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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