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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은 지금 우리 옆에도 있다

by 최준기



오래 전에 리디북스를 뒤적이다가 눈에 띈 책이었다. 프레드릭 베크만이라는 이름은 이미 오베라는 남자로 익숙했고, 책과 영화 모두 감명 깊게 접했기에 이번에도 실망하진 않겠다는 믿음으로 e북을 구입했다. 그리고 역시나, 한참 동안 읽지 않았다. 책을 사고 나면 읽는 건 뒤로 미루는 게 나의 특기이자 취미다.

소장욕은 강한데 의욕은 늘 부족한 게 문제다.

그래도 일단 사놓으면 언젠가는, 몇 년이 지나서라도 결국 읽게 되니 좋은 책은 미리 사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눈 덮인 마을, 아이스하키 팀, 스포츠단 이야기라는 설정에 마음이 들떴다.

빙판조차 녹여버릴 뜨거운 청춘과 열정, 어쩌면 슬램덩크처럼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도전을 그린 이야기일까 기대했다. 베어타운이라는 마을은 어쩐지 포항이나 거제도 같은 느낌의 도시였다.

한때 번영했지만 산업 구조가 바뀌며 쇠퇴하고, 일자리는 줄고, 젊은이들은 빠져나간다. 마을 사람들은 현실을 알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다.

대통령의 할아버지가 와도 청년들의 수도권 이주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베어타운은 회사도, 청년도, 하키선수들도 이웃 도시에게 하나둘씩 빼앗기고 있었다.




그런 베어타운에 남은 마지막 희망은 아이스하키 청소년 팀이었다. 만년 꼴찌, 실력 부족, 줄어드는 후원금. 악순환 속에서도 마을은 10년간 유소년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실력은 부족해도 가족 같은 팀워크로, 서로를 믿고 지켜주며 하나가 되겠다는 다짐. 그렇게 자라난 팀이 전국 대회 4강까지 진출했고, 중심에는 유난히 재능 있는 선수, 케빈이 있었다. 마을은 이 팀이 베어타운을 살릴 희망이라 믿었다.




만약 그들이 우승이라도 한다면, 정치인들도 베어타운을 다시 보게 될 테고, 아이스하키 특구 지정, 인프라 확장, 일자리 창출, 인구 유입 같은 기적이 일어날 거라는 꿈에 마을은 들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 모두가 그들을 영웅처럼 대했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책이 청춘 스포츠소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4강전을 이기고, 케빈은 부모님이 비운 대저택에서 파티를 연다. 선수들과, 그들에게 호감을 가진 여학생들. 파티 속에서 오가는 말들은 불쾌하고 노골적인 성적 대상화로 가득하다. 그리고 마야, 구단주의 딸이자 평범한 소녀는 그곳에서 케빈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녀는 온몸에 멍이 들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숲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온다.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 잊고 혼자 참으면 모두가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며칠 뒤, 창밖에서 뛰노는 여자아이들을 보며 침묵은 더 큰 비극을 부를 수 있다는 생각에 용기를 낸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경찰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결승전 당일, 케빈은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케빈 없이 치른 결승에서 베어타운 팀은 패배한다. 단 한 경기만 이겼다면 마을이 꿈꾸던 변화가 현실이 되었을 텐데. 10년간의 노력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된 순간, 마을은 분노의 방향을 마야와 그녀의 가족에게 돌린다.


“케빈을 짝사랑하다 뜻대로 안 되자 거짓말을 했다.”

"화장도 옷도 작정한 듯 보였다."

케빈을 질투한 페테르가 딸에게 시킨 일이다."




도저히 입에 담기 힘든 소문과 공격이 시작된다.

창문에 돌이 날아들고, 사물함에는 욕설이, 급식 시간엔 우유를 뒤집어씌우는 학생들. 피해자는 마야인데, 알렸다는 이유로 죄인이 된다. 마야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지옥에 빠진다.




이 대목에서 문득 우리 사회가 떠올랐다. 베어타운이 서울, 하키단이 기업이나 정치 조직이라면? 조직은 전진해야 하고, 중요한 인재는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피해자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가 입을 열면 조직은 흔들리고, 대중은 그 사실 여부보다도 ‘왜 굳이 그걸 말해서 우리 모두를 곤란하게 만드느냐’고 묻는다.

집단의 이익 앞에 양심과 정의는 사소해진다.

너무도 끔찍하고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우리도 살고 봐야 하잖아요, 엄마. 부탁이에요. 그 아이 때문에 우리 가족을 잃고 싶진 않아요. 우리 삶을 잃고 싶진 않아요. 저는 절대 괜찮아지지 않을 거예요. 이 일은 절대 바로잡히지 않을 테고 저는 계속 어둠을 무서워할 거예요……그래도 노력해봐야죠. 끊임없이 전시 상태로 지내는 건 싫어요.
- 《베어타운》 중-



이 대목을 읽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피해자는 결국 침묵하거나 포기한다. 모두가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본인의 고통을 가리고 감춘다. 그리고 자책한다. 자신만 참았더라면 모두가 괜찮았을 거라고.



베어타운은 단순한 청춘 소설이 아니었다.

차디찬 빙판 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끝내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찌르는 작품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단 하나의 뜨거운 진실.

어떤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바로 잡아져야만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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