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더 선해질 수 있는가
장발장은 빵 하나를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우리는 대체로 그 정도 이야기만 알고 있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은 빵 이야기보다 훨씬 더 무겁고 묵직한 울림이 있다.
레 미제라블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용서’가 한 사람의 인생과,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준다.
장발장이 출소 후 도둑질을 했던 미리엘 주교의 집.
그는 “은촛대는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며 장발장을 감싼다.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전율이 느껴진다.
‘과연 나는 누군가를 이렇게 용서할 수 있을까?’
주교는 본인의 저택을 병원으로 쓰게 하고,
초라한 집에서 살며, 가진 돈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단순히 은촛대를 준 인물이 아니라 미리엘 주교의 이야기만으로도 하나의 문학이었다.
장발장은 가난한 하층민이었다.
누나와 조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빵을 훔쳤지만,
법은 그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증오를 키웠고,
사회가 덮어씌운 ‘중범죄자’라는 낙인은
그를 점점 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그 낙인에 맞춰 행동했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의 은촛대는
그 모든 낙인을 조용히 부수는 망치였다.
‘나는 정말 쓰레기일까? 아니면…?’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장발장은 사업가로 성공하고,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어 시장이 된다.
그는 이제 사회의 빛이자 영웅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샹 마티외 사건’은 그의 양심을 시험했다.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 진실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몇 년째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정말 양심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을까?’
그는 결국 자신을 내던졌고,
그 순간 장발장은 더 이상 죄수가 아닌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레 미제라블엔 장발장만큼이나 불쌍한 이들이 등장한다.
팡틴은 시대가 여성에게 허락한 좁은 길 때문에
몸과 마음이 무너져갔다.
그녀의 순수함이 세상에 부서질 때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냐를 떠올렸다.
가난이 한 사람의 존엄을 어떻게 짓밟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자베르는 악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융통성 없는 정의감은
결국 장발장을 끊임없이 추적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자베르 같은 사람을 보면
세상에는 법보다 더 큰 ‘인간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를 만나
자신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인간성을 되찾았다.
용서 한 번,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 미제라블은 거대한 스토리이면서도
결국 한 사람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미리엘 주교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미리엘 주교 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장발방을 만들어내는가?
어쩌면 처벌보다 교화가 세상을 더 살기좋게 만드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