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마차
오렌지카운티의 날씨는 바삭거리는 소리라도 낼 것 같은
기분 좋은 바람과 송곳처럼 파고드는 햇살도 그리 밉지 않아
볼티모어의 꿉꿉하고 질척거리는 공기와는 사뭇 달랐다.
비가 가난하게 내리는 캘리포니아는 아침에 일어나면
나뭇잎이건 잔디밭이건 늘 촉촉하여 싱그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밤공기와 한낯의 햇살이 밤새 엎치락뒤치락 싸워 태어난 이슬 덕분 일러라.
나무 아래로 들어가면 유리파편 같은 햇살도 무뎌지고 뭉텅 해져
모시옷을 입은 것 같은 청량함이 마술처럼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가방 하나가 전부인 살림살이는 조금씩 늘어났는다. 내 전용 머그컵이 생기고
손톱깎기며 면도기도 늘어났다.
수건도 사고 양말도 사고 작업복도 사고 외출, 작업 겸용 운동화도 샀다.
그래도 해소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동수단이 제일 번거로웠다.
일하러 갈 때 그리고 교회에 갈 때는 공권사 차를 타고 가서 문제는 없는데
한국마켓이라도 한번 가려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차를 구입하려고 애를 쓰는데 수중에 돈이 없으니
난감이 두 팔로 앞을 가로막는다.
공권사 잔디밭 한구석에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차 한 대가 눈에 밟히더라.
그 차는 공권사 큰아들이 몰다가 새 차를 구입하면서
비상용으로 있던 거라 저것 좀 살 수 없느냐고 물으니
한번 알아보마 하더니 팔겠단다.
얼마냐고 값을 물으니 3000불은 받아야 하는데
2000불만 달랜다 천불씩이나 깎아주신 권사님이 순간 성모 마리아로 보이더라지.
수중엔 1200불 정도가 있었는데 나머지는 일해서 갚기로 하고
내 생애 첫 차를 가지게 되었다.
베이지와 금색이 적당히 섞인 1981년에 생산된 쉐비 싸이테이션 이었다.
자동차는 10년의 세찬 파도를 건너오면서 몸에 이곳저곳
생채기가 가득하였다.
시트는 각종 얼룩으로 한 폭의 그림이 그려있고 타이어는 매끄러워
일전짜리 링컨 머리칼이 다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얼마나 좋은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닦고 또 닦아 페인트가 벗겨질 정도였다.
안에는 먼지 한 톨이라도 있으면 큰일이 난 것처럼 몽둥이로 내쫓는 마음으로 닦고 또 닦았다.
새끼도 처음 자식이 예쁘더라고 얼마나 이쁘고 좋은지 남들이 보면 똥차라고 손가락질
할 망정 난 처음으로 산 내차가 이쁘고 신비로와 정말 정말 좋았다.
먼 훗날 은퇴 전에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구입 한차는 2019년 닷지 램 1500 리미티드
풀 옵션에 스페셜 에디션으로 켄터키 더비 로고가 새겨진 픽업트럭이었다.
워싱턴주에 단 2대만 배정되었다는 딜러의 흥분된 목소리로 떠벌리던 차를
구입했지만 처음 구입할 때의 감동은 한참이나 못 미쳤다.
선데이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먼지도 없는 차를 베큠도 하고 거품목욕을 시키고
그런 난리가 없었다.
교회도 따로 가니 각종 회의에 공권사가 들어가면 난 할 수없이
예배당 주위를 배회해야 했는데 그럴 일도 없고
한국 마켓도 자유롭게 갈 수 있으니 새로운 신세계가 열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역시 고물차는 고물 차 성격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시동을 걸라치면
푸드드득 피유 하면서 애를 먹이고 한참을 달리다 컥컥거리다 시동이 꺼져
브레이크가 듣질 않으니 도로경계석에 부딪쳐서 겨우겨우 세워야 하는 아찔한 일이 다반사였다.
어느 날은 수요예배에 가는데 보닛에서 연기가 나서 세운일도 있었다.
폐차장에서 장례식을 치러야 할 차를 끌고 나왔으니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한 번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드드득 탁탁하여 세워보니 펑크가 났더라.
차들이 씽씽 달리기 하는 황량한 도로 옆에서 어쩔 줄 몰아 쩔쩔매며 진땀을 바가지로
쏟아내었고 손짓 발짓 지나가는 차를 세워 도움을 받아 스페어타이어로 갈아 끼우고
자동차 샵에 갔더니 펑크 난 타이어는 어디 있냐고 묻는데
거기에 두고 왔다고 하니 가서 찾아오랜다.
하여 가봤더니 타이어는 온데간데없었다. 터덜터덜 돌아오니
정크장에서 구해와서 새 타이어로 교체하란다.
지금이야 이렇게 말이라도 하지 그때는 참으로 장이 열 번은 더 뒤집힐 환장 할 일이더라.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차는 나한테 팔기 2년 전에 2000불에 사서
나에게 2000불에 판 것을 큰아들이 엉겁결에 토설하고 말았더라.
헛웃음이 나오는 일들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나올 줄 내 미처 몰랐더랬다.
갈수록 이민생활 수업료는 높아만 가는데 내 허리는 자꾸 휘어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