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렌샤워 블루스 2
미국은 얼음을 많이 소비한다.
음료수에 넣어마시고 하드리커에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이 얼음이다.
얼음공장에서 얼음을 받아서 그로서리와 리커스토어 (독한 술을 파는 상점)
그리고 세븐일레븐 같은 편의점등에 납품하는 것이 일이다.
월남전이 한창 일 때 양 사장은 베트남에서 중장비 관련 일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왔단다.
아내와 자식은 한국에 있다는데 가족 이야기는 잘하지 않더라.
아침 일찍 얼음공장에 가서 냉동시설이
탑재된 밴에 그날 배달할 얼음을 싣고
코리아 타운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신혼살림집이 있었다는 임페리얼 하이웨이
북쪽으로는 그렌데일 옆동네 패사디나까지 다녔다.
겨울에는 얼음 공급이 원활했지만 여름엔 새벽에 가서 공장 앞에
대기해야 물량을 맞추는데 처음엔 5시 점점 짧아져
어느 때는 새벽 3시에도 가야 하는데 그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어느 날 얼음을 배달하려 주유소에 들렀는데
옆에 있는 자동차 샵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손에 공구를 들고
지나갔다.
처음엔 갸우뚱하다가 다시 보니 엄마야 이게 누군가?
다름 아닌 고등학교 은사님이셨다.
난 너무 반가워 달려가서 선생님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혹시 김ㅇ영 선생님이 아니시냐고 물었다.
낯선 사내의 아는 체에 선생님은 어쩔 줄을 모르셨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 잠시 후 너 태유 아니냐고 놀란 웃음을 지으신다.
야 반갑다 반가워
그런데 네가 여긴 웬일이냐며 시커먼 기름손으로 잡아주시더라.
고등학교 시절 일 학년 때부터 규율부였던 나는 선생님들과 사이가 돈독했다.
학도호국단에서도 활동하였는데 당시에
철원 땅굴을 견학한 것과 대성리에서 수련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를 많이 아껴주셨던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양ㅇ모 선생님 여ㅇ창 선생님
왕ㅇ희 선생님 한ㅇ숙 선생님 그리고 김ㅇ영 선생님이 특히 이뻐해 주셨다
가끔 롯데리아 알바가 늦은 시간에 끝나면 영등포 신길동 집까지
가기 어려우면 난 학교로 향했고 선생님의 양해로
수위실이나 숙직실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1979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롯데리아 아르바이트생 모집 첫 번째 그룹이었다.
그때 시급이 450원이었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 아니할 수없다.
지금은 없어진 롯데 1번가는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이 지하로 연결하는 중심부에 있었다.
중간쯤 위치한 분수대가 인상적이었다.
이후 2호점이 명동 에스콰이어 구두점 인근에 개점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신격호 롯데 창업주가 점퍼차림으로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탤런트 임예진 등 연예인을 가까이서 볼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햄버거와 닭튀김을 싸들고 학교로 올라갔다.
선생님들은 간혹 맥주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고
그중 몇 분의 선생님은 맥주 한 컵을 슬며시 건네주기도 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학비를 버느라 일 년의 세월을 보낸 나를
선생님들도 알고 계시더라.
김ㅇ영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선생님 말고도
두 분이 엘에이에 사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분은 다운타운 자바시장에서 봉제업도 하시며
구세군 사관학교에 적을 두신 임ㅇ치 선생님과
그로서리를 하시는 박ㅇ 선생님이었다.
후에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타국에서 뵙는
두 분의 선생님과 사모님께 식사를 대접하였다.
시간이 한참 지나 김ㅇ영 선생님은 시애틀에서도 만나는 인연이 이어졌다.
지금은 엘에이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딸과 의사인 사위
그리고 수의사인 아들과 소파에 누워 인사해도 이쁘다는
베트남 의사 며느리를 두고 계신다.
그렇게 얼음 장사를 하며 지낼 때 엘에이에 폭동이 일어난다.
그 유명한 1992년 4월 29일에 터진 흑인폭동
나는 그 폭동 한가운데서 약탈과 방화 분노와 허탈
그리고 인간의 잔인한 욕심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