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가장 큰 행사인 어린이날이다. 봉자의 늦둥이 아들 민우는 수요일에 봄운동회를 마치고 재량휴업일인 목요일부터 연휴에 들어갔다. 연휴이지만 목요일엔 아동센터에 갔다가 금요일에는 시청에서 주최하는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하기로 되어있다. 민우는 101회 어린이날에 표창장을 받을 예정이다. 아이들이 몇 명 되지 않는 시골 학교에서 졸업하기 전에 시장상을 받게 되어 봉자네는 큰 경사이다. 아빠 도식의 몇 해 전 시장상에 이어 민우까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민우의 누나가 셋이나 서울에서 내려왔다. 봉자부부는 일 마치고 내려오는 딸을 위해기차역에 마중가는 것 대신 잠을 택하였다. 내일을 위하여 몸을 눕혀 휴식하는 것은 일만큼이나 중요하단 걸 해가 갈수록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마을회관까지 오면 농로길을 민우가 마중 가기로 했다. 농로길은 그리 길지는 않으나 좁고 험해서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차를 운전하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무엇보다도 고라니가 밤길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사람이 더 놀래기 십상이다. 봉자는그런 밤길을 남자라고 선뜻 마중 가 주는 민우가 든든했다. 삼 년 공 들여 얻은 아들이 이런 맛이구나 싶었다.
봉자 내외가 살풋 잠이 들었을 때 아이들이 주르륵 뛰어 들어왔다. 잠이 깬 봉자가 몸을 일으켰다. 까맣던 하늘에 소나기성 빗방울이 내렸다. 하루 종일 참더니 아이들 올 때까지 참았다가 이제야 퍼부었다
봉자의 딸들은 민우가 시상식에서 입을 옷과 신발이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입어보고 산 것 같이 잘 맞는 옷과 신발은 사 준 사람에게도 입는 사람에게도 보는 봉자에게도 흡족했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꽃 좋아하는 봉자에게는 노란색, 진붉은색, 분홍그러데이션의 꽃을, 아빠 도식에게는 셋째 딸 미녀가 카네이션 머리띠를 하고 직접 꽃이 되어 모자를 선물하였다. 언제나 그랬지만 모자는 도식을 십 년은 젊어 보이게 했다. 일종의 뗐다 붙였다 하는 성형제품으로 도식은 요즘 들어 부쩍 모자를 애정했다.
만족스러운 선물 증정이 끝났다. 그리고 어버이날 선물 하나를 더 주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에 돈보다 더 좋은 포도밭 일을 연휴 3일간 꼬빡 도와주겠다고 했다. 꽃을 적당한 크기로 자르는 일인데 이 일은 집중력과 순발력이 필요하다. 농사일에서는 기술자라고 할만하다. 봉자는 이런 날을 위하여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일을 시켰다. 아동 노동착취였다고나 할까. 성인이 된 지금은 알아서 하니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이럴라고 아이를 많이 나았나' 봉자의 딸들은 일을 도와줄 때면 엄마, 아빠를 놀려 먹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저온 창고에서 꺼내 놓은 샤인머스캣 한 쟁반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러게 포도농사 안 지었으면 어쩔 뻔했어?”
“누가 보면 코끼리가 사는 줄 알겠다?”
“한밤중에 포도를 1인 1송이 하는 사람들이 어딨 어?”
“ 아이고 야들아 빌 소리 다 한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단다. 아무 소리 말고 많이 먹어래이.”
한밤중 산골 외딴집이 떠들썩했다. 야행성 산 짐승이나 잠든 짐승이나 이미 익숙한 풍경이어서 그러려니 할 것이다. 가끔씩 자신의 둥지임을 알리는 백로의 어울리지 않는 울음소리가 ‘웩웩’ 들리기는 했다.
비는아침까지 내렸다. 아이들은 어린이날 행사를 위하여 꿀잠을 반납했다.
봉자 부부에게는 언제나 농사철이면 농사가 우선이었다. 민우에게도 이런 일은 예사여서 이번 시상식에 엄마, 아빠의 참석은 바라지도 않았다. 누나 세 명이면 족했다.
행사장에 도착하여 민우는 시상식 연습을 했다. 시간이 되자 어린이날 행사가 무색하게도 어른들이 더 많았다. 어른들을 위하여 어린이들이 판을 깔아 놓았다고나 할까. 무슨 시의원들이 그렇게 많은지 어린이들은 꼼짝없이 앉아서 벌을 서야만 했다. 간단하게 소개인사를 하는 어른들이 고마웠다.
민우는 의젓하게 수상을 했다. 키가 제일 컸고 하얀 얼굴이 돋보였다. 민우의 누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30여 명의 어린이와 어른들의 시상식이 끝나고 어린이의 관심을 끄는 내용도 있었다. 시장이 늦깎이 신입 경찰관의 모범사례를 소개했다. 식사하던 사람이 쓰러져 숨을 쉬지 않자 심폐소생술로 살려 낸 여 순경의 이야기가 소개되자 아이들이 크게 박수를 쳤고 눈이 빛났다. k 예술고가 낳은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 ‘심찬양’을 소개할 때도 아이들의 눈은 빛났으며 박수소리가 우렁찼다. 그럭저럭 행사가 끝났다.
민우는 자랄 만큼 자랐는지 어린이날 퍼포먼스에는 참여하기 싫어했다. 이젠 누나들과 외출이 한결 수월해졌으므로 점심메뉴를 고르는 일도 쉬워졌다. 특히나 민우의 키가 커지면서 누나의 아들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아서 서로가 좋았다.
민우는 누나들이 농사일을 도울 수 있도록 오후 시간은 스스로 보낼 줄도 알았다. 그렇지만 어린이날임을 강조했다. 저녁은 민우가 좋아하는 중화요리를 먹기로 했다. 배달이 안 되는 산골이므로 음식은 직접 찾으러 갔다. 한창 운전에 재미를 붙인 봉자의 셋째 딸인 미녀가 빗길에 용기를 내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이름하는 음식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울 아들 덕에 잘 얻어먹는다고 도식이 말했다. 그러자 민우는 자신이 왜 상을 받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상 받을 만큼 잘한 일이 없다고 했다. 저녁을 먹다가 산골 외딴집은 빵 터졌다. 도식이 말했다.
“ 울 아들이 왜 잘한 게 없어.
첫째, 건강하지.
둘째, 친구들하고 잘 지내지.
셋째, 학교 잘 댕기지.
이만하믄 된 기지! 뭘 더 잘하라고.”
“ 맞아 맞아 ”
민우의 누나들이 합창을 했다. 표창장에 쓰인 대로 '새 시대 미래의 인재'가 될 민우는 한쪽으로 기울던 몸을 고쳐 세우고 의젓한 자세로 자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산골 외딴집 창밖에는 이틀째 봄비가 빗금을 그었다. 창밖으로 빗금 친 숫자만큼이나 조잘조잘 이야기가 새어나갔다. 일이 바빠서 직장을 지키는 둘째는 충실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아름답다고 봉자는 애써 마음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