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대 교수의 창의의 3단계: "암기->이해-> 창의"
처음으로 입사하고 부서 배치를 받은 날
2002년 11월.
처음으로 부서 배치를 받았다.
그 해 4월부터 연수를 받으며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지내다가 11월 드디어 연수원을 수료하고 '실전'에 투입된 시점이다.
무언가 두렵기도 하고 잘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앞서서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져 있던 시기로 생각된다. 그 이전에 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다녀오고 시험공부를 하며 지냈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낯선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 같은 느낌. "자. 이제는 실전이다."
과에 처음으로 배치받은 나는 실로 어느 하나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신입이었다. 회사 이메일 계정 신청 같은 자잘한 일부터 회의 참석, 업무 파악 등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두 달이 흘렀다. 과에 주변 분들은 '그래 신입인데, 네가 뭘 할 줄 알겠냐" 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당시 나를 봐주었겠지만, 정작 나는 뭔가 한시라도 빨리 업무 환경, 사람 관계 등에 적응해서 이 조직의 일원인 양 '자연스럽게' 안착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보고서로 소통하는 조직
조직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소이 팔방미인이면 최고다. 업무 관련 디테일을 잘 파악하고, 그 디테일을 바탕으로 보고서도 잘 쓰고, 대인 관계도 좋으며, 회의나 업무협의 등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소통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설득해서 얻어내는 능력 등을 모두 갖춘 '넘사벽 엄친아'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속한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미인이 되기 위한 팔방 중에서 보고서 작성 능력이다. 보고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단순히 문장력이나 필력이 좋을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과 관련된 사실관계와 그 배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그리고 한두 페이지에 핵심 내용을 추려서 담아내는 센스, 그리고 그 보고서를 윗분들에게 조리 있게 설명하는 능력. 그 모든 것이 다 어우러져야 한 편의 완결된 보고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종합 예술'이다.
그렇게 내가 속한 조직은 보고서로 소통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곳이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창의론'
그런데 갓 배치받은 따끈따끈한 신입인 내가 그 보고서를 잘 쓸 리가 만무했을 것 아닌가. 야근 때, 주말에 가만히 앉아 그 보고서를 어떻게 하면 빨리 2~3년 차 '고인물'들 만큼 잘 생산해 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종로학원에서 재수할 때 당시 연세대 철학과 현역 교수셨던 김형석 교수께서 이른 아침에 학원에서 한 강의가 떠올랐다. 한 시간 남짓되는 강의의 주된 내용은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였는데,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창의의 3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교수님이 주장한 창의의 3단계는 '암기', '이해', '창의'였다. 자신이 학문 분야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려면 일단 기존의 이론이나 학문적 성과를 암기하고, 암기를 한 것을 되새김질하다 보면 이해를 하게 되고, 그 이해가 있어야 비로소 이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창의성 기르는 교육만 한다고 암기와 이해 과정을 건너뛰면 절대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 시를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일단 암기를 하고 계속 되뇌다 보면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 과정을 거쳐야 창의적인 시를 창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창의론'과 보고서
김형석 교수의 창의론과 신입의 보고서 쓰는 능력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얘기를 꺼냈나 하는 분들도 계실 듯하다. 그러나 창의론은 나의 보고서 쓰는 초기능력치를 결정짓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창의는 암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떠올린 나는 같은 과에 있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게 보고서를 써서 과장, 국장에게 보고하면 한 카피씩을 얻어서 찬찬히 꼼꼼히 읽어보는 습관을 들였다. 가끔은 과장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던 터라 '아 이런 내용은 이렇게 보고서에 담고, 이렇게 보고를 하는구나' 하면서 '보고서와 보고'를 연결 짓는 연습도 귀동냥으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선배들의 업무 폴더를 '조용히' 공유해서 내 컴퓨터로 옮긴 후 짧은 한 두 페이지 보고서뿐만 아니라 아주 큰 대책들이 담긴 보고서를 선별한 후 읽고 또 읽었다. 그 선배들이 쓴 보고서의 양식, 내용 배치, 그리고 표현들을 그대로 답습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로 당시 같은 과 내에서는 폴더를 공유해서 다른 사람들이 파일을 볼 수 있게 네트워크가 연결돼 있었다. '책은 훔쳐서라도 읽으라'했으니 하루빨리 제대로 일 인분을 하는 직원이 되기 위함이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과 내에서 이전에 생산되었던 보고서들을 쭉 섭렵하면서 회사 내에서 통용되는, 아니 일 잘하는 선배들의 우수한 프로토콜을 익힐 수 있게 되었고, 여전히 지금도 보고서를 잘 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소위 '찐다'는 아님을 확인받으면서 지내고 있다.
남보다 앞서가려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남보다 앞서가려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서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경제학의 격언 중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있다. 원래 의미와는 다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니 그저 남들만큼만 해서는 추가적으로 나만을 위해 주어지는 것은 없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조직에서 인정받으며 지내려면 남과는 다른 나만의 무기가 필요하다. 그 무기가 무엇인지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