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땐 사무실보다 술자리에서 더 배워요
회사에 막 입사해서 보름도 채 안되던 시기였다.
나는 신입사원으로서 아무것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마냥 내 컴퓨터 안에 있던 전임자의 자료를 하나하나 꺼내 읽고, 책상 위에 꽂혀 있던 자료들을 읽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보냈다. 신입사원으로 소위 군기가 들어있던 시절이라 같은 과 선배들이 야근한다고 남아 있으면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양해를 구하지 않고서는 다 같이 퇴근할 때까지 같이 사무실을 지켰다.
그 당시 우리 과에 가장 선임 선배 H가 계셨다. 지금 생각해도 워낙 일을 잘하던 분이라 ‘계셨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그는 일을 워낙 깔끔하게 잘 처리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과에 가장 선임이었기 때문에 늘 일이 많아 야근을 했다. 그러다가 10시쯤 되면 그 과중한 업무와 야근의 스트레스라도 풀려는 듯 10시쯤 되면 술자리를 거쳐 집으로 갔다. 당시만 해도 싱글인 나는 그 선배가 10시쯤 가자하면 마냥 좋아 따라나섰다.
어떤 때는 그 선배와 술을 마시려고 일부러 10시까지 할 일을 찾아 사무실에 남은 적도 있고, 어떤 때는 집에 일찍 가서 자다 보면 10시경 어김없이 나를 찾는 전화가 온다. “어디냐?” “저 집인데요?” “어디로 와라” “옙“ 하고는 차를 몰고 술 마시러 간다. 그리고는 그 선배를 아파트 현관에 모셔다 드리고 난 다시 집으로 오는 걸 자주 반복했다.
야근을 하고 술을 마신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그 선배와의 ‘인간적인 교류’를 위해 축적된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이 나에게 그 후로 회사생활을 순탄하게 해 준 동력이었다고 감히 자부한다.
사무실에서 그 선배와 할 수 있는 얘기는 하루에 몇 마디 되지 않는다. 자기 일 처리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 바쁜 사람을 잡고 이것저것 물어볼 수가 없다. 나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다.
그런데 밤에 술자리에 가면 딱 둘이다. 그리고 밤이라는 시간이 주는 진실의 타임, 술이 주는 긴장감 완화의 효과 등으로 이런저런 선배로서 갓 입사한 신입 후배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들을 절호의 시간이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빨리 일하는 법을 배워서 독자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 혹 다른 회사로 갈 기회가 있었을 텐데 왜 안 가고 남았는지.. 이야기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그 선배 한 명을 잡고 두 시간 세 시간 동안 호기심 천국인 내가 그렇게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 이후로도 흔치 않았다.
술.
분명 건강에 해롭고 다음날 숙취라도 있을라치면 하루가 힘들다. 그러나 과하지 않다면 사람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면서 속 깊은 인간적인 얘기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그 선배의 위치 보다 더 높이 올라간 지금 나는 아직도 그 선배만큼 되려면 한참이나 멀었지만, 그래도 그때 기억을 살려 후배들에게 술 한잔 권하면서 회사 생활, 사람 관계에 대해 어줍지 않게 조언해 본다.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정답은 늘 없다. 그렇지만, 그 선배가 베풀어준 그 시간. 조금은 후배들에게 돌려주려는 마음으로 오늘도 술 한잔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