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생각 = 너그럽지 못하고 옹졸하게 하는 생각
세상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어렵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버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이라는 그 존재를 가슴깊이 새기며 선을 행하려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나 또한 신적인 존재의 힘이 필요한 어느 시절에 성당과 교회를 거쳐 믿음을 의탁했었다. 지금은 내 마음에 교회를 세워 혼자 믿음을 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신은 내게 존재하고 그 강력한 에너지에 감탄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종교가 필요했고 권력과 명예와 여러 미묘한 것들의 복합체로 각 나라의 종교가 세워졌는데 그 작은 차이로 인해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여전히 갈등의 골은 깊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찌 보면 옹졸한 마음에 생각이 그치니 벌어진 일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들은 종교를 들먹이며 반대편을 억압하고 또는 원조라고 부르짖는 것일까! 왜 그렇게 살아가는 걸까?
Youtube로 우연히 , <더 스토닝(The Stoning of Soraya M)>이라는 영화의 영상을 보게 됐다. 그리고 그 관련 기사들을 검색하면서 중동지역의 처참한 여성들의 인권을 새삼 깨달았다.
1986년 이란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실화가 바탕인 이 영화는 너무도 처참하고 끔찍했다. 어느 집안의 가장이라는 사람은 14살짜리 소녀에게 새장가를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 옹졸한 인간은 자신의 아이들 엄마이며 아내인 '소라야'에게 간통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이혼하고 위자료를 주기 싫은 것이었다. (욕이 마구 나오는 인간이다.) 소라야의 아버지라는 사람도 그녀의 어린 아들들도 그 누구도 그녀 편은 없었다.
본인의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 몸부림쳐도 방법이 없고 이모 자흐라는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힘겨워한다. 어느 날 길을 잃고 이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이란계 프랑스 기자(프리든 사헤브잠)에게 이모 자흐라는 억울하게 죽은 소라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프랑스 기자의 펜을 빌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후 이 책을 영화화한 것이 바로 <더 스토닝>이다.
여성의 인권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에 가입을 하고 메일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단체 가입은 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전 세계의 여성들 인권에 관심이 있다는 작은 동료의식이었다. 그런데 메일의 내용을 확인하다 어느 날 나는 탈퇴를 하고 말았다. 인도의 어느 작은 마을에 12명의 청년들이 2명의 인도 여성을 집단 강간한 후 살인을 했고 그 시체를 길 위에 버젓이 놓은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나무에 행잉 했던 것 같다.) 그 여성 인권 다체는 그들의 구속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탈퇴를 했기 때문에 이후 행적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들에게 법적인 절차가 진행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와 중동지역에 태어난 여성들의 인권은 아직도 처참하기 그지없다. 만약 그들이 그 나라에 태어나기로 선택을 했다면 그들은 왜 그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선택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존중받을 수 있을까? 그 어떤 신의 율법에도 여성을 그런 식으로 대하라는 말씀은 없을 텐데 그들은 여전히 교묘하게 여성을 상품 취급하고 있다. 나는 그런 기사나 운동을 보면 너무 화가 난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몇 달러 보내주거나 사인을 하는 것뿐이다. 물론 그들에게 그것은 큰 힘이 된다고 하지만 내가 받는 스트레스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어졌다.
한때는 NGO에서 일하며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 그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일은 어떨까 하며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다. 내 성격상 오래 살진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지적능력이 어린아이 수준의 남성들이라면 더욱 살길은 없어 보인다.
<더 스토닝>은 너무도 끔찍한 옹졸한 마음을 보여준다.
신이여 그들을 용서하지 마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