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렝 드 보통
프롤로그
10년 만에 읽은 문학, 몸이 배배 꼬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동경해 신청해본 독서클럽의 스노우볼이 이렇게 구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읽기나 자기계발서와는 너무 달랐다. 물론 신선한 충격이다. 분명 수험생 때는 문학 문제를 더 잘 풀었는데...
"나를 왜 좋아해?", "내가 어디가 좋아?"
흔히 연인들 사이에서 '대답을 잘 해야하는' 질문으로 꼽힌다. 수학 문제처럼 명확한 정답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그렇다고 답을 못하면 뭔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마치 소꿉놀이처럼 보여지던 유치하고 서투른 사랑의 일부분을 글귀로 담아서, 읽는 이로 하여금 유치한 사람이 될까봐 연애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치유해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게 할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 / 내용 中
썸을 타는 상황 속에 쉽게 고백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저 기준이 천차만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질 때 서투르고 불완전해보인 것을 싫어한다. 이론적으로 유치하지 않게, 완벽하게 보이려는 굉장히 피곤한 스타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누군가를 먼저 사랑한다는 것에 주저함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이것을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유'로 자기 합리화를 시켰다.
레이첼과의 또 다른 사랑을 앞둔 시점에도 나는 마음을 관통당했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쉽게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는 '금욕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 역시도 나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위해 형식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 말이다. 그래서 표본이 많지는 않겠지만 내 이야기와 책의 스토리 간의 공감대가 생겼다. 서투르고 줏대없는 사랑의 방식보다 훨씬 성숙한 글귀로 불완전한 내 지난 시간들을 감싸줘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사랑에 대한 조언을 구해본 적이 거의 없다. 특히 사주나 타로를 볼 때도 '연애운'을 본 적도 없고, 내가 언제 사랑할 수 있을까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이미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모르겠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에 제 3자의 조언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딱 한 번, 사랑에 관련된 내 생각에 기준을 재정립해준 일이 있었다. 10년 전, 스무살 때 짝사랑했던 친구에게 들었던 말이다. '이성친구를 사귈 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글로 사랑을 공부한 나는 신뢰라고 답하고, 그녀는 끌림이라 답했다.
충격이었다. 짝사랑하는 입장에서 '끌림'을 100%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 안보였다. MBTI 검사를 하더라도 꼼꼼한 계획적 성향의 나에게, 추상적인 '끌림'의 매력을 찾긴 힘들어보였다. 그래도 이 일이 있고 난 뒤로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혹은 누군가에게 좋아함을 받는 것에 대해 완전히 열린 마인드가 됐다. 점차 나는 클로이와 같이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원인과 결과, 과정과 이유를 따지고 싶지 않아했다.
그 이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멀리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 마치 '낭만적 편집증'에 집착하듯 이유를 찾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온다면 그 때의 시간과 내 생각들을 모두 즐기기로 했다. 물론 나는 상처 받기 싫어하는 겁쟁이기에 그런 순간이 자주 찾아오진 않았다.
입장을 바꿔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찾으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한다. 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면 적어도 잃는 것은 없지 않을까. 어짜피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끌림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나, 불특정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유쾌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거나 나를 사랑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저 언젠가 혹 '끌림'을 사랑의 시작점이라고 표현하는 상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소박한 목표라면 목표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책을 읽으며 화자와 유일하게 다른 이론 한 가지.
만약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라도, 그 사람의 매력은 절대 빛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