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읽고
#프롤로그
이 책은 눈길을 끌 수 밖에 없는 굉장히 많은 조건을 갖췄다. 첫째는 운동과 관련된 서적에서 보기 힘든 '소설', '에세이' 류의 글이라는 점. 스포츠 서적은 무궁무진하게 많지만 그 표현의 형태가 말랑말랑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유명 선수들을 다뤄주는 일기 형식의 책들은 아무래도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명확한 사실에 기반한 스토리 전개가 되기 때문에 읽으면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진 않는다. 그 점에 비춰봤을 때 사실과 상관없는 운동과 관련된 스토리를 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웠다.
둘째는 여성과 축구를 접목시켰다는 점.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포츠와 관련된 정보를 습득하는 절대 다수는 남성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그 간극이 조금씩 깨지고 있다. '골 때리는 그녀들' 예능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운동을 재밌게 즐기는 여성분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으니까.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관심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이야기에 흥미를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는 타깃 독자층이 매우 넓다. 여성분들을 상대로 작게는 '너도 직접 축구 해볼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던져줄 수도 있고, 넓게 보면 꼭 축구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불특정 무언가에 대한 메시지로 해석하게 할 수도 있다. 한편 축구라는 카테고리에 원래 흥미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유형의 책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게 한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으로 책이 나를 이끌고 간 만큼, 읽으면서도 자유롭게 지금까지 일어났던 내 주변 이야기들과 매칭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다음은 이 책의 교훈과 의미와 연관있지만, 직접적 내용과는 무관한 '우아하고 호쾌해지고 싶은' 4가지 추억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우승을 한다면
그건 남자축구가 아니라 '여자축구'일거야"
스포츠를 정말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여자축구 경기를 90분 모두 본 일이 흔하지는 않다. 스포츠를 가리지 않고 보니 몇몇 여자축구 클럽팀 이름을 알지만, 클럽팀 경기를 직접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몇몇 국가대표 경기는 있다. 과거 17세 이하 여자 월드컵에서 여자축구 대표팀이 일본을 승부차기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한 전무후무의 역사가 있다. 연령별 대표팀이지만 월드컵 우승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만약 여자축구 성인대표팀에도 남자축구 대표팀 투자에 20%만 한다면 여자축구가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을까? 라고 아쉬운 상상을 많이 했었다.
여자축구는 아니지만 여자농구를 비롯해 컬링, 골프와 같이 국내에서 여성 종목이 더 인기가 있는 몇몇 스포츠들을 좋아한다. 반드시 피지컬만이 스포츠를 보는 매력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더 섬세한 플레이와 전략, 전술을 바라보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내 눈으로 경기를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적당한 속도감 때문에 여성 스포츠를 보는 것도 있다. 성별을 떠나 어떤 스포츠든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그 스포츠의 매력을 느끼기 위해 직접 축구판에 뛰어든 저자의 스토리는 형식이 글인데도 불구하고 4D로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한 편의 축구 경기 같았다. 축구에 영 재능이 없는 나에게는 부러우면서도 존경스러운 이야기였다.
"남자가 무슨 공기야, 너에게만 선택의 기회를 줄 수는 없어"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선택을 했던 순간이 있었다. 당시 반에서는 담임선생님의 주최로 '체스'와 '공기' 대회가 열렸는데, 남자 종목이 체스, 여자 종목이 공기였다. 두 종목에 모두 자신이 있던 나는 모두 참가하고 싶었지만 형식적인(?) 규정에 발목이 잡혔다.
여러 설움의 순간을 모두 요약하고, 결론적으로 반 여학생이 15명인 덕분에 나는 16강으로 열린 공기 대회에 남학생으로는 나만 특별 참여를 할 수 있었다. 결과는 준우승. 공깃돌로 펼친 1:15 대결은 아직까지도 꽤 머릿속에 깊게 남은 추억이다.
축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심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축구는 '팀 대항'이기 때문에 개인의 실력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지 않는다. 골을 넣지 못해도 상대 선수 1명을 지워낼 투지만 있다면 축구에선 '1인분'이다. 성별이 다른 팀이 붙어도 공은 둥글고,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오빠는 야구를 정말 쉽게 잘 알려주는 것 같아"
스포츠캐스터 지망생 시절 알고 지내던 한 동생이 어느날 연락이 왔다. 지방의 아나운서로 일하게 돼 경기 현장 리포팅을 나가야 하는데, 야구 과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야구가 정확히 몇 명이 하는지도 잘 모르던 친구를 위해 마치 9등급 친구 과외를 하는 것처럼 야구 기초와 표기법, 멘트 작성법 등등을 알려줬던 일이 있었다.
그 친구에게 '야구를 쉽게 잘 알려준다'는 말을 들은 것이, 야구 팬 20년차인 내게 가장 보람있었던 순간이다. 야구 20년 본 야구 팬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야구를 알려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가 야구를 좋아한다면 정말로 누구보다 잘 알려줄 자신이 있어'라는 설명 부심 때문에 책 내용에서 '맨스플레인' 이야기를 보며 무언가 콕콕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그 챕터만 다시 읽었다.
다행이다. 분명 나는 '흥미가 있지만 미처 잘 몰랐던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누군가에게만 잘 설명해줄 뿐이다. 그 어떤 공놀이라도 함께 즐기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니까.
"나의 것을 만들기 위해 시야가 넓어야 해"
새로운 것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의지로 불타 올라 기초가 되는 것들부터 배워나간다. 하나씩 배울 때는 재미도 있고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킬 때부터 내 머릿 속과 손과 발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 분명 6번 선수만 마크하면 되는 대인 방어는 간단했는데, 지역 방어가 적용되고, 공간 전술이 들어가고, 공격의 임무가 주어지기 시작하면 몸이 배배 꼬이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세운 목표의 크기와 상관 없이, 과정에 대한 만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시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단계씩 과정을 밟아 나가더라도 일관된 방향성이 있어야 내 색깔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할 때도, 용과 바론을 먹는 게임을 할 때도, 내 커리어를 쌓아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