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4.3.8/금)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바람이 싸다구를 마구 때리는 날이었다. 오늘은 양싸다구를 맞아가며 그렇게 미루던 정신과를 다녀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음, 날짜가 좀 지났는데 암튼 그래요"
"좀 어떠셨어요?"
"아, 월요일은 쉬는 날이었고요"
"화요일은 언니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 다녀오고요"
"수요일은 병원 쉬는 날이었고요"
"어제는 장염 때문에 못 오고요"
"오늘 왔습니다"
"네, 언니가 여러 명인데 어떤 언니 말씀하시는 거죠"
"아, 둘째 언니요"
"그래요"
"장례식에는 자매분들 다 오셨나요?"
"네, 물론이요"
"자매분들 사이는 어떠세요?"
"네, 좋습니다"
"잘 됐네요. 지금 얼굴을 봐도 상당히 많이 좋아지신 게 느껴지네요"
"안정을 많이 찾으신 거 같아요"
"약은 떨어지지 않으셨고요"
"네, 안정제는 반쪽씩 먹거나 잊어버린 날 거 있어서 괜찮았고요"
"우울증 약도 잊어버린 날 남은 거 먹어서 괜찮았어요"
"그래요, 잘하셨네요"
"다른 생활은 어떠세요?"
"네, 다 잘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한참 글 쓰는 게 재밌고 다른 생각이 안 들었거든요"
"근데 제가 정기적으로 명분을 필요로 할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제가 글을 쓰는 플랫폼에서 메인에 올라오는 글을 읽다 보니 전 너무 쓸거리가 없는 거 같아요"
"엄청 굴곡지거나 고생을 한 거 같지도 않고, 서울대 다니다 그만두고 해외로 떠난 사연도 없고.."
"내가 글을 쓸 자격이 있나, 내가 너무 작아지는 느낌도 들고요"
"하하하..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다들 인생의 사연이 엄청나겠죠?"
"네"
"제가 이게 성격인가요? 아님 정신증상인가요?"
"성격이죠"
"환자분이 좀 스스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성향이 있어요"
"너무 겸손한 것도 힘든 거죠"
"서점에 가서 책을 봐도 '아 이런 책은 왜 썼을까!' 하는 책도 있고 '쓰느라 참 애썼구나'하는 책도 있잖아요"
"별 내용도 아닌데 자서전을 내는 사람도 많고 읽을게 하나 없는 책도 많고요"
"음.. 전 그런 책은 안 쓰고 싶은데요"
"그러니까요. 내 말은 자격이나 반드시 사연이 있을 필요 없다는 거죠"
"글에는 픽션도 있는 거고 사실만 쓰는 게 아니니깐요"
"자격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사건이 있으면 쓰기야 좋겠죠"
"그건 일회성이에요. 글을 좋아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예요"
"네"
"환자분 성향이 그런 면이 있지만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한다고 생각하세요"
"글 공부한다고 하더니 저번보다 훨씬 밝아졌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성격이었군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봄에는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잘 됐네요"
"히히, 감사합니다"
"네. 약 2주분 드릴게요"
"잘 지내시다 또 뵐게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휴..
오늘은 늦게 왔다고 안 혼났다.
내가 이렇게 덤벙이는데 또 나를 괴롭히는 성향이 있다니.
사람이란 참 신기한 존재이다. 길도 잘 잊어버리고 핸드폰도 맨날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다른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지저분한 건 싫어하는 모순.
마치 회는 좋아하는데 물회는 못 먹는 모순.
나는 뭔가 색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은 그림 같다. 그래도 속은 아주 시원한 하루였다. 싸다구에서 뇌 속까지~~
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