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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07. 2024

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4.3.7/목)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무른 하늘이 웃지도 울지도 않은 날이었다. 도로를 달리고 달려 고인을 모신 자리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 드리는 슬픔, 고인의 안식을 비는 마음으로였다.


삶의 처음과 끝이 다름을 알게 됐다. 태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내가 먹는 일이던데. 마지막에 먹는 이는 내가 아니었다. 장례식은 사람이 사는 동안 돌보고 도움 받았던 사람들에게 식사를 초대하고 떠나는 의식이었다.


나서는 이름을 얻고 떠날 때엔 이름값을 내어 놓는 .


그것이 삶에 전부였구나.


고인을 다른 에 모시고 고인의 가족들과 작별을 하는 시간이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별은 헤어지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역시 아빠와의 이별을 직접 하지 못했다. 때론 남은 이들끼리 추억을 나눠 갖는 것도 이별의 한 방법이리라. 알면서도 그냥 받아들이기엔 참 사무치는 이별임은 틀림없다. 화요일의 피로가 아직도 남아있다. 우째 이래 회복이 더딘 건지. 세월이 나를 비껴갈 생각이 없나 보나. 정신과 가는 날도 며칠이나 늦었는데, 또 늦게 왔다고 혼나게 생겼다.


오늘은 세브란스 안과 정기검진일이지만 예약을 변경했다. 의료대란이기도 하고 컨디션도 난조상태이다. 이번주는 요대로 다른 스케줄 없이 보내야 버틸 거 같다.


언니한테 갈 때 휴게소에 들렀었다. 갑자기 안 먹던 커피가 하나 먹고 싶어져 이게 큰 화근이 되었다. 이 프림 커피 하나 먹고 체해서 장례식 가서도 아무것도 못 먹고 심지어 아직까지도 복통에 체기가 남아있다. 약 먹고 따고를 다했는데 이래 오래가다니.  물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더니 태어나 두 번째이다. 한 번은 정말 물만 먹고 체하고, 이번은 커피 먹고 체하고.


에혀.

"삼일이다. 배야"

"이만하면 내 많이 아팠다 아니가"


어제는 티브이를 보다가 역사 얘기가 나왔다. 프랑스 얘기를 하다가 아들과 뜻이 맞지 않아 옥신각신 했다. 이젠 커서 그런지 사춘기라 그런지 감정선이 울퉁불퉁하고 제법 어려워졌다. 나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앙투아네뚜의 명예회복을 안 해주는 프랑스가 이해 안 간다고 말하고, 아이는 시대적인 인식의 차이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어제는 둘 다 왜 그랬는지 서로의 논점에 한 치의 양보도 안 했다. 뚱해진 우리는 결국 '게임 원신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한 시간 정도 같이 들으며  현악기와 관악기 얘기를 하다가 풀렸다. 


참 치사스럽고 웃긴 일이지만 아들과 싸우는 게 제법 재밌다. 욱하는 모습을 보면서 밖에서의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되고 학교에서 발표하는 얼굴도 보이는 거 같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어떻게 풀리는 성향인지 알아가는 시간들도 쪼금은 재미있다. 가족일수록 진짜 속을 모르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사춘기를 바라보는 게 싫지만은 않다. 늘 이렇게 엄마와 티격태격하며 건강히 자라주길. 그래서 또 다른 너의 굴을 파고 먼 길을 쉬다 가다 하는 어른이 되길...


오늘도 하늘이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우산 들려 보내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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