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산책길에 바람이 슬그머니 비밀을 알려줬다. 저 멀리에서 가을이 오고 있다고...
나는 아득한 안개 터널을 걷고 있지만, 가을이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급해진다. 이 터널을 건너면 빨갛고 노란 가을을 만나겠지?
아직은 아스팔트와 하늘이 꼭 껴안은 뜨거운 여름이다. 작열하는 여름의 하늘은 바다처럼 파랗다. 파란 하늘 위에는 뭐가 있을까?
상상하자면 하늘 위로 가면 인간이 생각할 수도 없는 시간의 터널이 있을 테다. 터널 안에는 터널이 중첩되어 있고, 과거와 미래가 없는 시간을 초월한 전자들의 세상이 있을 테다. 전자들의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가능하고, 초월할 수 있을 테지. 파동과 전자 에너지의 파도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인간의 생과 사, 고통, 욕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곳에서는 흐름만이 존재할 것이다.
"흐름... "
형태가 중요하지 않고, 이성과 탐욕이 사라진 세상. 이곳이 유토피아 아닐까.
이번생에 나의 유토피아 없다. 단지 존재만이라도 유지하는 게 숙제이다. 나는 깊은 터널 속을 걸으면서도 늘 희망을 더듬거린다. 벽 어딘가에는 끝이라는 화살표가 새겨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아님 터널밖에서 새 모이만큼이라도 빛이 새어 들어오진 않을까?
알 수 없는 시간, 알 수 없는 긴 터널을 걸으면서도 잊지 않는 게 있다.
다 지나간다..
지나다 보면 존재하고 있고 흐르고 있다. 지나간다는 말은 희망도 아니며, 불행도 아닌 사실이다.
나는 현실을 버티는 일에만 힘을 쓴다. 9월엔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다. 나는 그 작가님과 9월 어느 날에 갑자기 만나자고 약속을 해놨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시간이라 꼭 만나 뵙고 싶다.
그러려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어제는 과호흡에 불안증이 더 심해졌다. 갑자기 이놈과 싸워서 이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누워서 쌕쌕 거리는 시간이었겠지만 어떻게든 일어나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베란다 물청소를 하고, 아이에게 삼겹살 덮밥을 해줬다. 그렇게 두세 시간 온 집안 청소를 하고 나니 과호흡과 불안증이 지나갔다. 나는 식은땀으로 샤워를 하고 뭔지 모를 뿌듯함을 얻었다.
매번 우울증, 불안증, 심발타 부작용들과 싸울 수는 없다. 하지만 싸워볼 만한 타이밍을 살펴야겠다. 그렇게 자꾸 부딪히는 횟수가 늘다 보면 나의 신경전달 오류도 조금씩 좋아지지 않을까!
우울증의 세계는 글과 같다. 모든 스토리와 장르가 가능하다. 누구든 작가가 될 수 있다. 우울증도 누구든 환자가 될 수 있고 이 질병에는 평균치도 없다. 하물며 의사 선생님도 증상과 약의 효과를 환자만큼 알 수는 없다. 이병의 증상은 일반화가 없는 병이라 더 어렵다.
그 점에서 나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질병코드는 우울증으로 통합했을지 몰라도 증상은 사람의 지문과 같아서 똑같은 사람이 없다. 단지 사람들의 표현의 한계 때문에 통념이 존재할 뿐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모르니깐, 겪어보지 않았으니깐 살 수 있는 건 축복이다. 세상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와 세포들의 세상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훨씬 겸손해지고 온순해질 것이다.
흔히 반려동물로 가장 성공한 동물이 개라는 이야기가 있다. 반면 동물학자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건 인간입니다. 가장 인간사회에서 반려동물로 잘 길들인 건 인간 우리 자신입니다 "
나는 이 말에 매우 공감한다. 우리가 진정한 우리의 존재를 안다면 좀 더 숙연해지고 고요해질 수 있다.
인간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그렇기에 그리 무겁게 생각하고 살 필요도 없고, 한계에 닿아 끓어오를 필요가 없다.
한계란 없음을 알게 된다면..
오로지 흐름만 있음을 알게 된다면 인생을 좀 더 가벼운 숨으로 보낼 수 있을 테다.
그저 오늘 내가 존재함으로 감사한다.
그거 하나면 된다.
"다 지나간다..."
P/s. 쓰고 나니 나에게 하는 말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