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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수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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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Nov 09. 2024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순간들

수필통

(텃밭 농사 지을 때 일입니다)


그이는 손이 예쁩니다. 연필 잡는 일을 하니 곱고 긴 손이 고생을 안 한 사람 같지요. 그럼에도 그이는 텃밭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저보다 열정적으로 물을 주러 가고 고랑을 파는 모습을 보면 그보다 멋질 수가 없습니다.


"식사하세요~"


"응. 곧 갈게"


그의 대답에 웃음이 납니다. 왠지 전원일기의 한 장면 같아서 행복하더라고요. 가끔은 밭에서 밥을 먹습니다. 삼겹살을 싸갈 때도 있고, 짜장면을 시킬 때도 있고요ㆍ


언제는 그이가 호수로 텃밭에 물 주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봤습니다. 노을 진 햇살도, 바람에 일렁이는 콩들도, 물을 꿀꺽꿀꺽 먹는 열무들도 더없이 신나 보였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이구나"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알고 싶지 않고, 아프지도 않고, 열무랑 배추랑 키우며 고랑이나 파고, 돌이나 줍고, 나만의 랜드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벌레들이 먹다 남은 깻잎을 따고, 목말라 몸매 관리 못한 오이를 따고, 가지는 따서 옷에 슥슥 문질러 한입 베어 먹고, 한 소쿠리 들고 주방으로 가는 삶. 저는 이런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걸 따서 바구니에 담아 차를 타고 다시 도시로 나와야 하는 실정이지요. 집에 도착하는 순간 판타지는 깨지고 현실과 세상이 강제로 연결되어 버립니다.


요즘은 그이가 하도 열무김치 타령을 하길래, 몸은 아프고 할 엄두가 안 나서 농가 직거래 장터에서 주문을 했습니다. 생산되는 데로 버무려 오는 거라 이주일 남짓 걸렸지만 그만한 값을 하더라고요. 여린 열무순으로 담가서 맛도 상큼하고 심심하니 좋았습니다. 아들에게 열무김치에 꽁보리밥 비벼준다고 하니 한사코 싫다는 거예요. 한 세 번쯤 얘기하니 포기했나 봅니다.


"알겠어. 알겠어. 한번 먹어볼게"


꽁보리밥에 열무김치를 서너 번 자르고 고추장 조금 넣고 참기름 넣어 썩썩 비벼서 참깨 살짝 뿌려 내어 줬습니다. 아들의 반응이 흥미로웠습니다


"오 비주얼이 매우, 음 매우.."

"음. 맛이? 오 이게 뭐지? 한 알 한 알 밥을 꼭 씹어야 할 것 같고, 보리쌀이 고소하게 도망 다니면서 김치와 궁합이 굉장히 시골틱한데 맛있는 것도 아닌데, 또 자꾸 입에 들어가는 이상한 매력이 있어"


"그럼 내일 양푼에 다 같이 비벼 먹을까?"


"응, 그것도 괜찮아, 이게 맛이!"

"아, 백샘이 오셔야겠는데, 암튼 처음 먹어보는 음식인데 매력이 있어"


그렇지요. 모두가 같은 음식을 좋아할 순 없지만 때가 되어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텃밭에 나는 열무도, 냉이도, 고구마도 다 신기하고 소중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모르긴 몰라도 고구마도 옥수수도 그 애들의 세상은 또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않을까요? 전이제 그 애들의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싶은데.. 인간도 받아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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