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탑골공원의 하루

by 이음

매일 아침, 종각역 4번 출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얀 운동화를 신고,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노인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 도장을 찍는다.


이곳은, 탑골공원.

공원의 장기판에는 이미 선점 경쟁이 벌어졌다. 나무 그늘 아래 자리 하나 차지하려면 아침 7시는 기본이다.
장기알을 꺼내 놓고, '두 점 깔았으니 오늘은 내가 먼저지' 하며 익숙한 투덜거림도 시작된다.

김영감님은 전직 교사였다. 칠판을 지우던 분필가루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다고 했다. 자식들은 미국으로 갔고, 아내는 오래전 암으로 떠났다.
"손자 얼굴은 사진으로만 봐. 요새는 영상통화도 잘 안 받아."
그의 목소리는 쿡쿡 헛기침처럼 가볍고, 묵직했다.
오후 3시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근처 국밥집에서 천천히 혼밥을 하신다.

최영감님은 한때 무역회사 과장이었다. 사람들을 휘어잡는 말솜씨가 대단했는데, 지금은 말보다 침묵이 익숙해졌다. 영감님은 가끔 젊은 시절 이야기를 꺼낼 때면 이윽고 눈빛이 반짝 거린다.
"그때는 말이야, 일본 바이어랑 밤새 술 마시고도 계약 땄다니까."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그는 오늘도 상대방 장기알을 멍하니 바라본다.

누구는 이곳을 ‘노인들의 집합소’라 하고, 누구는 ‘고독한 도시의 안식처’라 말한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히 ‘그들만의 회사’이다.
직급도 없고 성과도 없지만, 이 회사만의 규칙이 있다.
늦게 오는 사람에겐 자리가 없다. 욕설도 금지,
패하면 쿨하게 인정. 주폭도 금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이 늙어간다는 은밀한 위로가 있다.

사람들은 이들을 향해 '세월에 떠밀려 나온 그림자'라며 측은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지켜낸 ‘존재의 그림자’라 여긴다.

숨죽여 살아온 삶. 잊히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꾸역꾸역 일어나는 삶.

탑골공원의 하루는 그렇게 흐르고,
누군가는 조용히 옷깃을 여미며 혼잣말을 한다.
“내일도... 출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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