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의 하루
"어라, 박영감 오늘 안 나왔네?"
최영감이 장기알을 천천히 굴리며 말한다.
“비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부는데, 무슨 일 있나…”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나와 장기를 두던 박영감이 이틀째 보이지 않는다. 처음 하루는 "어딜 좀 다녀오셨겠지" 했지만, 이틀이 지나니 괜한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장기판 옆에 놓인 그의 방석이 덩그러니 비어있다.
"몸이 안 좋아 그러셨겠지."
누군가 말하자, 최영감이 고개를 끄덕인다.
박영감은 고혈압에 천식까지 있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공원에 꼭 나왔다.
“집에만 있으면 사람이 썩어버려, 그래도 여기 나오면 웃을 일이 있잖어.”
그의 그런 말들이 생각난다.
박영감은 젊은 시절 포항제철, 지금의 포스코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다. 거기서 30년을 넘게 버텼다.
철가루와 열기, 유독가스 속에서도 그는 일터를 지켰다.
"그땐 그게 나라를 위한 일이었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고."
그는 자주 말하곤 했다. 자부심은 컸지만, 그 일은 그의 폐를 서서히 갈아먹었다.
용접 마스크로는 막을 수 없는 그 먼지와 연기들. 천식은 그때부터 시작됐고, 고혈압 약도 그때부터 먹었다. 퇴직하고 나서는 병원만 전전했다.
처음엔 산재 신청도 생각했지만, 복잡한 서류와 회사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손을 놨다.
"그냥 병원이나 잘 다니자, 괜히 싸워봤자 내 몸만 더 상해."
그는 체념한 듯 말했지만, 말끝은 항상 떨렸다.
최영감은 오늘따라 박영감이 처음 천식 발작을 일으켰던 날을 떠올린다.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던 그의 얼굴. 소방차보다 늦게 온 구급차.
“괜찮다”면서 돌아가던 그날의 뒷모습.
퇴직 후 병든 몸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산업재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 못한 고통들. 기업은 ‘정년퇴직’이라 했지만, 그는 '버림'이라 말했다.
누구도 그의 폐를, 그의 숨을, 그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았다.
장기알을 만지작거리던 최영감이 무거운 한숨을 쉰다.
“그래도, 꼭 살아서 다시 봤으면 좋겠어. 장기 한판 지더라도.”
그의 말에 공원은 고요해졌다.
잠시 뒤,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엔 한 세대를 버텨낸 노동자의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우리가 얻기 위해 잃어야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