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판 자리 싸움

탑골공원의 하루

by 이음

공원엔 늘 같은 자리가 있다.
동그란 테이블, 그 위에 펼쳐진 장기판, 그리고 아침마다 먼저 나오는 사람이 앉는 자리. 그 자리를 누가 먼저 차지했느냐에 따라 하루의 흐름이 바뀐다.
오늘은, 그 질서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이 자리는 내가 어제부터 예약해 놓은 자리야.”
“허참, 무슨 벤치에 예약표라도 붙여 놨어?”

탑골공원 중앙, 장기판 앞에서 박영감과 최영감이 또다시 불이 붙었다. 바둑돌 튀기는 소리보다 두 노인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장기판은 이 공원의 심장 같은 공간이다. 아침 9시, 도로 쓸고 일찍 나온 노인들이 신문지 깔고 한 자리를 차지한다. 자리 싸움은 말이 좋아 선점이지, 실상은 침묵의 권력 다툼이었다. 박영감은 늘 2번 판에 앉아 있었다. 구력 30년, 공원 랭킹 3위, 팔자걸음에 중절모 쓴 모습은 공원의 ‘고수’로 통했다.

반면, 최영감은 전직 교장 출신으로, 얼마 전부터 공원에 나오기 시작했다. 겉으론 온화했지만, 바둑판 위에선 칼 같은 사람이다.

그날도 평소처럼 박영감이 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이미 자리를 차지한 최영감이 바둑돌을 손에 쥔 채 말했다.

“선착순 아닌가? 나는 8시 반부터 여기 있었네.”

박영감은 헛기침을 하며 물러섰지만, 주변에서 ‘어르신이 졌네’라는 말이 들리자 얼굴이 붉어졌다.

“어제 내가 허리 아파서 잠깐 늦은 거지, 여긴 내 자리란 말이야!”

“여기 공원 땅이 박씨 겁니까?”

“적어도 눈치라는 게 있지!”

말이 거칠어지자 구경하던 어르신들도 끼어들었다.
“두 분 다 참으세요. 애들도 아니고…”

“아니, 요즘 새로 나온 사람들이 너무 날뛰어!”

“날뛴다니요?”

장기판은 순식간에 정치 토론회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원로 예우는 어디 갔냐!”


“여기가 노인정입니까, 공원이지!”

그 순간, 구석에 있던 이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매일 공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청년이었다. 노인복지과 인턴으로 와 있다며, 종종 바둑도 함께 두고 말동무도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어르신들, 잠깐만요. 저희가 이참에 장기판 예약제 만들면 어떨까요?”

“예약제?”

“네, 종이 칠판에 그날그날 순번을 적어두면 어르신들 싸우실 일도 없고요.”

노인들은 처음엔 시큰둥했지만, 박영감이 먼저 물러섰다.

“…뭐, 순번이 있다면 따를게.”

최영감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서로 얼굴 붉히는 것보다 낫지요.”

그날 이후 장기판 옆에는 작은 화이트보드가 생겼다. 청년이 손수 만들어 걸어놓은 것이다. 이름 쓰는 칸과 시간대, ‘양보는 미덕입니다’라는 문구까지 적혀 있었다.

장기판의 질서는 되찾았고, 박영감과 최영감은 며칠 후 처음으로 ‘짝’이 되어 장기를 두었다.

“어이, 최영감. 수읽기 실력은 봐줄 만 하구먼.”


“허허, 박영감은 입놀림 실력도 수준급이오.”


누가 먼저 앉느냐보다, 누가 먼저 마음을 푸느냐가 중요했다. 탑골의 바둑판은 그렇게 한 수 한 수, 공존을 배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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