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의 하루
가을 노을이 탑골공원 벤치를 길게 물들이던 오후.
정씨 할아버지와 박씨 할머니는 오늘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손엔 따뜻한 종이컵, 다른 손엔 오래 품어둔 마음이 있었다.
“어제 팔굽혀펴기 몇 개 하셨어요?”
“스무개요.”
짧지만 또렷한 대답이었다. 속에는 ‘아직은 할 수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그럼 오늘은 스물한 개 하셔야죠.”
장난스러운 말투에, 할머니는 잔잔히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었다.
저녁 노을빛이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요즘 큰애는 잘 지내죠?”
“네… 그런가 봐요. 직장 다니느라 고생이 많죠. 저를 닮아서인지 고집이 세서요. 가끔 부딪히면 마음이 좀..”
“나도 그래요. 우리 아들은 미국에서 살지만, 아직 집 한 채도 장만 못 하고 월세 산다더군요. 자식들이라고 늘 평탄하면 좋으련만….”
할머니는 먼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첫 만남을 떠올렸다.
몇 해 전, 겨울이 막 시작되던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운동기구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그 옆 벤치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찬 바람이 불던 순간, 코바늘이 빠져 벤치 밑으로 굴러갔다. 허리를 숙여 코바늘을 찾는데, 낯선 손이 함께 내려왔다.
“찾으셨어요?”
그 손이 바로 지금 옆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손이었다.
그날, 할아버지는 바늘 대신 따뜻한 생강차를 건네며 말했다.
“바람이 많이 부네요. 잠깐이라도 마시고 가세요.”
그때부터였다. 인사로 시작된 짧은 대화가 길어지고,
길어진 대화가 어느새 하루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때 바늘을 잃어버린 게… 오늘을 만든 것 같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날 안 만났으면, 아직도 혼자 운동만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잠시 고요가 흘렀다.
할머니가 손에 든 컵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우리 시대에는 참… 고생을 많이 했지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고,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고….”
“맞아요. 먹고사는 것도 아둥바둥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힘이 났습니다. 애들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살았으니까요.”
“세상은 변했고, 저도 늙었는데… 변하지 않는 게 있더군요. 마음이요. 길이만 조금 더해졌을 뿐,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그 시절의 제 모습만 사라져 있네요.”
할아버지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거, 지난번에 시장에서 봤는데… 당신 생각이 나서 샀습니다.”
은빛 테두리에 국화 문양이 새겨진 손거울이었다.
“아이고… 이제 거울 볼 일도 별로 없는데요.”
“아니에요. 여전히 고와요. 노을빛이랑 참 잘 어울리는걸요.”
할머니도 가방 속에서 목도리를 꺼냈다.
짙은 갈색의 부드러운 털실로 떠진 목도리였다.
“이거, 드리려고 떴습니다. 목이 시리실까 봐서요.”
할아버지는 천천히 목도리를 둘러보았다.
“따뜻하네요. 이거면 겨울도 거뜬히 나겠어요. 고맙습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고맙단 말씀은… 제가 드려야지요.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해 주셔서요.”
둘은 노을이 번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원 스피커에서 잔잔한 트로트가 흘러나왔고, 멀리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일은… 커피 말고 차를 사 오겠습니다. 더 따뜻하시게요.”
할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할아버지의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그날 노을은 오래도록 물들어 있었다.
서로의 지난 세월과 남은 시간을, 조용히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