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다시 설렙니다

탑골공원의 하루

by 이음

햇살이 유난히 부드럽던 봄날이었다.
공원 한쪽, 꽃화분 옆에 작게 놓인 테이블 위에 종이꽃이 놓였다. 누가 가져다 뒀는지, 어르신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별것 아닌 꽃 한 송이에 멈춰섰고, 그 중 한 분이 아주 작게 말했다.


“꽃… 받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요.”

이씨 할머니는 얼떨떨한 얼굴로 국화 한 송이를 바라봤다. 박영감은 쑥스럽게 중절모를 벗으며 말했다.

“그냥… 지난번에 도토리묵 나눠줘서. 감사 인사요.”

두 사람은 탑골공원 벤치에서 처음 마주쳤다.
박영감은 장기판 옆 고정멤버, 이씨 할머니는 가끔 바느질을 하며 손녀 손잡고 산책 나오는 분이었다.

처음엔 서로 눈인사만 하던 사이. 그러다 어느 날, 이씨 할머니가 가져온 도토리묵을 나눠준 게 계기였다.

“이거 직접 쑤셨어요?”


“그럼요. 집에서 심심하니깐요.”
그날 이후, 박영감은 벤치 자리를 옮겼고 이씨 할머니 옆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며칠 후. 두 사람은 함께 근처 시장을 걸었다. 박영감은 “거기 순대국 잘해요”라고 말했고, 이씨 할머니는 “그럼 나중에 같이…” 하다 말고 웃었다.

같이 걷는 걸 ‘산책’이라 부르기엔 쑥스럽고, 같이 밥 먹는 걸 ‘데이트’라 하기엔 민망한 사이.

하지만 사람들은 눈치챘다.
“두 분 요즘 자주 보이네요?”
“좋은 일이에요. 사람은 늙어도 마음은 안 늙는다니까.”

그러던 중, 소문이 퍼졌다.

“결혼한대!”


“누가?”


“박영감이랑 이씨 할머니. 황혼 결혼이래.”

공원은 하루종일 웅성였다. 누군가는 박수쳤고, 누군가는 “이 나이에 뭘…”이라며 수군거렸다.

박영감은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씨 할머니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사람들 말 많죠. 애들 눈치도 좀 보이고… 나도 혼자 사는 게 익숙한데…”

박영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 뒤, 조용히 말했다.

“결혼 아니어도 좋아요. 그냥… 밥 같이 먹고, 말 좀 나눌 사람이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며칠 후, 탑골공원 한 켠에서 작은 일이 열렸다. 박영감이 직접 써 붙인 종이였다.


‘소중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씨 할머니는 민망하다는 듯 웃었지만, 손은 박영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누군가는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노년의 사랑은 요란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밥을 먹고, 팔짱을 끼고 걷고,
병원 갈 때 손잡아 줄 수 있는 사람.
그게 전부이고, 전부 이상이었다.

탑골공원의 노을이 유난히 붉게 물들던 날,
두 사람은 그렇게 인생의 두 번째 시작을 함께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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