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통
어떻게 해야 노년을 잘 맺을 수 있을까? 나이는 자꾸 드는데 삶은 점점 무력해진다. 노년 글을 쓰다 보니, 삶의 희노애락이란 것이 얼마나 찰나의 무지개 같은 일인가 생각하게 된다. 내가 쓰는 글처럼 내 노년도 달콤할 수 있을까. 글이 삶이라면 나는 혼신을 다해 쓸 텐데 말이다.
죽어서 잊히는 사람이 있고, 살아 있을 때부터 잊히는 사람이 있다. 고독사는 잊힌 사람들의 이름이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노인의 나라라고 한다. 나도 늙어가고, 당신도 늙어가고, 우리 모두 늙어간다. 우리는 죽음이란 굴레를 피할 수 없는 동지들이다.
나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서 보내드렸다. 그것이 내 욕심에는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아빠가 편찮으시기 전까지는 홀로 사시는 노인이셨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온 가족이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고, 한밤중에도 내려가곤 했다. 그런데 우리 아빠만은 그 두려운 고독사를 면했다. 그러나 요양병원에서의 임종은 평안한 임종이었을까? 최악이 아니었을 뿐, 최선도 아니었다. 딱딱한 병원 침상에 누워 자식들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떠나셨다.
노년을 준비한다는 건 단지 연금을 모으는 일이나 건강검진을 받는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사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서로를 피곤하게 여기고, 사소한 일에도 등을 돌리기 쉽다. 그러나 이 고립은 삶을 더 빨리 닫히게 만든다.
서로 기대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누군가의 하루를 묻는 일. 그것이 노년의 자산이자 생존의 기술이다.
우리 사회는 오래 살 준비는 했지만, 오래 함께 살 준비는 부족하다. 노년 복지 정책이 단순한 금전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동네마다 작은 돌봄 공동체, 취미와 노동이 결합된 협동 모임, 세대 간 교류의 장이 필요하다. 치매 예방 프로그램만큼이나,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감을 주고받는 시간이 절실하다.
그리고 이런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건 교육이다. 젊었을 때부터 노년을 배워야 하고, 노년에 들어서도 새로운 관계 맺기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고독사의 문턱을 낮추고, 남은 생을 ‘살아 있는 시간’으로 채우는 길이다.
노년은 결국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 완성된다.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맞이해야 할 진짜 노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