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2.12.23/금) ​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by 이음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오늘은 정신과 진료일이었다>


어제저녁부터 약이 떨어졌다.

덕분에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세요”


“음, 아버지는 좀 좋아지셨고요”


“어떻게 좋아지셨죠? 좀 구체적으로 말해 보세요”


“고열, 각혈, 혈변도 멈추셨고요. 폐렴도 좋아지셨고요."

"위기는 넘기셔서 조금씩 회복을 보이고 계세요”


“지금 입원하신 병원은 무슨 병원이죠? “


“재활요양병원이요”


“아~ 그렇군요”


“일주일 전에 왔어야 하는데, 일주일이나 늦게 오셨어요?"

"어떻게 된 걸까요?”


“두통이 심하거든요"

"두통약 시간하고 겹칠 때마다 처방약을 못 먹었어요"

"약이 좀 남아서 늦었습니다"


“아~ 좋아져서 안 먹은 건 아니고, 다른 약 때문에 못 먹었다는 거죠?”


“네”


“또? 증상은 좀 어땠나요?”


“음, 선생님 없던 증상이 나타났어요!”

“손이 수전증처럼 벌벌 떨리고요"

"손이 떨릴 땐 같이 심계항진도 심하게 옵니다”

“계속 혼잣말을 해요”

“걱정이네, 걱정이야”

“근데 뭐가 걱정인지 모르겠어요”


“아~ 다 불안장애 증상입니다”

“걱정하실 거 없으세요”


“공모전은 어떻게 되었죠?”


“흐흐흐 떨어졌습니다”


“아이고, 그것도 영향이 갔을 거예요”


“ 또, 다른 일은요?”


“선생님 저 치매일까요?”


“왜?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엊그제 남편이 애기틱 때문에 병원을 가는데, 한도가 없는 카드를 줬어요”

“한 번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어요”

“애기가 틱이 심해져서 사실 많이 걱정이거든요”

“애기가 먹는 틱 약도 세서 애기도 컨디션도 자주 늘어지고 지쳐해요”

“약을 안 먹으면 틱이 심해지고, 약을 먹으면 약이 세니 늘어지고요”

“그리고 제 머리가 자주 하얘집니다 “

“좀 전에 남편이 골목에 차를 대고 다녀오라고 했는데, 모르는 길 같았어요 “

“제가 남편한테 말했어요”

“여기가 어딘데? 나 모르는 길인데”


“뭐래, 자기 맨날 여기서 내려주면 혼자 다녀왔잖아? “


“몰라, 나 기억이 안 나”


“알겠어, 내가 델다줄게”


“오다 보니 ‘아’하고 기억이 났어요”


“매일 어제일도, 낮에 일도 구체적 기억이 안 나요 “

“몸은 덜 아픈데 정신이 그냥 어디 간 거 같아요!”

“남편이 오늘 뭐 했냐고 물으면 기억이 안 나서 ‘몰라’라고 말해요 "


“남편이 베란다 화분 다 거실로 옮겼네라고 말하면"

“아~ 맞다. 나 화분 옮겼지, 이렇게요"


“ㅎㅎ 치매 아니에요. 조기 치매도 60세는 돼야 하고요. 30~40대에 치매 걸릴 확률은 비행기 사고 날 확률보다 작아요"

“얼마 전에 드라마에 젊은 사람이 치매 걸린 얘기 나와서 그런 환자분이 많이 오셨어요”

“보통 환자분 나이에 치매가 오려면, 교통사고로 뇌 손상이라든가, 뇌수술 후유증 등의 경우가 많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

“다음 달이면 우리가 만난 지 6개월이네요. 처음에 왔을 땐 호전이 빨라서 조기치료가 가능할 것 같았는데, 집안일이 생기고 상황이 안 좋아지니 당분간 더 치료를 꾸준히 해야겠어요”


“약을 줄이는 방법은 용량을 줄이는 방법으로 가고요"

"당분간 뛰어넘지 말고 꾸준히 드세요"

"약을 더 강하게 하진 않을 거예요”

“내원하신 동안 지금 불안증상이 최고로 높아요"

“불안이 진짜 심각할 땐 손도 떨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이런 증상이 옵니다”

“표정은 웃고 있어도, 정신은 힘든 상태인 거예요”

“그러니 인상 쓸 일이 없는데 내가 왜 불안하지 걱정하지 마시고요"

"약 꾸준히 드시고 나는 못 느껴도 내정신은 벅찰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세요”


“자.. 크리스마스인데 연말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코로나 때부터 송년회는 안 갔고요"

"저희 가족은 원래 무슨 날은 안 나가요"

"그전 주나 다음 주에 나가죠"

"사람 많은 거를 별로 안 좋아해서요”

“집에 트리 장식하고 케익이나 사고 조촐히 보내려고요”


“그럼 올해는 이제 못 보겠네요”


“ㅎㅎ 네, 선생님”


“ 그럼 약 잘 먹고 내년에 보시죠”


“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오늘은 기존에 비해 진짜 짧게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서로 질문이 많이 줄었다.

간호사 선생님에게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를 하고 나오니 실감이 났다.

진짜 올해가 다 갔구나. 아쉬움이 더 큰 해였지만 득도 있는 해였다.

그래.. 나름 잘 넘긴 해이지 싶다.


나는 아직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

내 머릿속은 평생 모르지 싶다.


난 대체로 웃고 사는데 왜 불안증이 최고조가 됐을까?


역시 세상에서 나를 제일 모르는 건 나 자신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2.12.1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