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1.27/금)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by 이음

<1월 27일 상담일지>


오늘은 행복이 잠깐 스쳐간 하루였다. 오전부터 분주한 서류 준비로 점심까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꼼꼼히 준비한 만큼 누락된 서류 없이 제출을 잘 끝냈다. 몸은 긴장되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가벼워지고 좋았다. 병원을 가기 전까진 말이다. 분명 맑은 정신으로 들어갔는데, 나올 땐 머리에 바위 하나를 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네”

“그동안은 좀 어떠셨나요? “


“네, 그냥 별일은 없었고요”

“월요일 저녁부턴 많이 아팠습니다”


“왜요?”

“무슨 일 있었나요?”


“아뇨, 아버지도 그대로 시고, 상황이 달라진 건 없습니다 “

“왠지 운동을 하면 좋아질 거 같아서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칠천보씩 이틀 걷고요. 만보 이상 이틀 걷고요”

“집에서는 스트레칭하고 요가하면서 근육을 풀었어요 “

“약을 안 먹어도 불안장애도 안 오고, 신경통도 없더라고요 “

“갑자기 숨이찬 공황도 없어지고요 “

“그런데 딱 4일밖에 못했습니다”


“왜 못했죠?”


“4일째 밤부터 밤새 구토하고요”

“숨이 너무 차고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졌어요”

“오심도 심했고요 “


“무리했나요? 왜 그랬을까요?”


“안 아플 때는 이만 보도 거뜬히 걸어 다녔거든요. 웬만한 거리는 다 코앞이라고 걸었어요 “

“그러니 저는 줄인다고 줄여서 걸은 건데 체력은 아직 부족했나 봅니다 “


환자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직 젊다면 젊거든요. 그러니 너무 조급히 생각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세요”


“그럼요. 선생님 전 아직 젊다고 생각합니다”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전에는 환자분이 이렇게 많이 아픈 게 이해가 어려웠거든요”

“이제는 완전히 이해가 갑니다”


“어떤 점이요?”


“사람은 두 종류가 있어요”

“컵에 물이 반컵이 들어 있다고 해봐요”

“부정적인 사람은 ‘반 밖에 없잖아’라고 말할 거고요”

“긍정적인 사람은 ‘반이나 들어 있네’라고 말하겠죠 “

“환자분은 ‘물이 반이나 있으니 아껴 마시고 다른 사람도 나눠 줄 수 있겠어’하는 유형이에요”

“다시 말해 이런 건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

“희망의 값과 현실의 값을 동일시하는 사람이에요”

“생각에는 물이 많으니 나도 마시고 나눠줄 수 있잖아요? “

“그런데 정작 물은 반컵뿐이니 나눠주고 나면 내가 마실 물이 없겠죠?”

“생각이 희망이라면 현실과의 괴리감이 생기겠죠? 그러면 그 부분은 본인의 겪어야 하는 몫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건이 있거나, 해결할 일이 있을 때도.. 인간은 자신을 먼저 지키는 이기적인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먼저 지키고 주변을 돌아보는 거예요”

“특히 자본주위 사회에선 말이죠”

“그건 나쁜 게 아니거든요”

“인간의 본능이에요”

“생존본능이요”


“네”


“아버지 일만 해도 그래요”

“자식이 본인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마음에 짐을 크게 가지는지 이해가 않갔거든요 “

“사실 사실만큼 사신 분이고 다른 형제분들도 많은데 왜 큰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는지요”

“물론 부모님인데 마음이 쓰이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나의 상황과 나의 건강이 허락되지 않는데.. 사실만큼 사신 아버지가 당장 지켜야 하는 나와 내 자식보다 먼저일 수는 없는 거거든요”

“금전적인 면도 그래요. 시댁과의 일에서 그런 처사는 환자분을 점점 병들게 하는 일입니다 “

“사람이 힘들어서 죽는 게 아니에요 “

“힘들어도 희망이 있으면 버틸 힘이 생깁니다”

“희망이 없을 때 사람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지요 “

“환자분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희망의 크기로 보고 있어요”

“당연히 정신도, 육체도 한계가 올 수밖에 없지요”

“보통은 여기 오시는 분들은 거의가 부정적이세요”

“나를 탓하든, 세상을 탓하든요”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본인에 나이는 늦었다고 생각하시죠”

“환자분은 과하게 긍정적이죠”

“그건 긍정적인 게 아니에요”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는 좋을 수 있어요”

“본인에게는 가혹한 것이지요”


“…………….”

“그럼 선생님 저는 왜 그럴까요?”


“살고 싶으니깐요”

“살아야 하는데 현실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깐 희망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

“이 만큼이면 족하다. 행복하다. 괜찮다”

“억울해도.. 다들 그러고 살지, 나만 그럴까 “

“지극히 나를 제외시키는 삶을 선택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먼저로 생각하고, 분노하세요 “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살라는 게 아닙니다”

“컵에 물이 반만큼이나 남았네까지만 하세요”

“그 이상은 나를 희생시키는 일이에요. 감정이든, 물질이든, 건강이든이요”


“제가 이상한 건가요? “


“아뇨, 이상하기보단 드문 케이스죠”

”누구라도 환자분처럼 될 수 있어요 “

“저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렇고요 “

“자라온 환경과 처한 상황과 기질의 문제겠지요”


“네………..”


“현실을 직시하고 마주치세요. 그래야 견디는 힘이 단단해집니다”

“정신력으로 버티니 지금은 건강도 정신도 한계가 온 거예요”

”내가 단단해져야 세상과 맞설 힘이 생깁니다 “

“맞설 때는 맞서야 해요 “

“낙관적으로 보는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아셨죠?”


“네…….”


“그럼 잘 지내시고 2주 후에 뵐게요 “


오늘 선생님과의 상담은 나의 삶 자체를 흔들어 놓는 말씀이었다. 인간은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과 말도 경청해야 하는 건 맞다. 나의 중심만 있다면 들을 건 듣고 흘릴 건 흘리면 될 뿐이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 말씀은 팩트 같았다.


나름 잘 치료받으며 차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근본적인 원인을 몰랐던 모양이다.


선생님 말씀이 전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전혀 예상도 못했던 부분이라 멘탈이 탈탈 털렸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내가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무슨 느낌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냥 나는 바보로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못 챙기고, 희망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


난 내가 편한 데로 살았다고 생각했다. 싸우기가 싫어서 늘 손해 보는 쪽을 택했다. 나에겐 싸우는 일이 더 큰 스트레스였다. 타인이 뭐라고 하든 나만 아니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직 우리 아들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주변 사람들이 웃는 게 나의 행복이라 생각했는데 모두 나의 착각이었다.


몸도 정신도 나아지려면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 할 텐데, 쉽지 않은 일이다.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나 제일 처음 배운 게 포기였다. 매일 싸우는 언니들을 보며 갖기보다는 놓기를 습득했다. 중간에 끼어 가족들의 구름다리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셋째로 태어난 이유가 컸다. 그렇게 자라온 환경은 성장과정을 길들였다. 나는 결혼을 해서도 그렇게 살게 되었다. 그 모든 일련의 시간들이 쌓여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알았다.


나를 지킬 단단한 힘을 길러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병원에 다녀와서 실컷 울고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선 금세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의 이런 성격들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보통 상담을 가면 환자가 더 많은 말을 하고 선생님은 들어주는 것 같던데, 우리 선생님은 본인이 80%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매번 살짝 혼나고 오는 느낌이 든다. 약간 학교 선생님 같은 분위기? 그래도 선생님 나이가 많으셔서 다행이다. 다 환자 나으라고 하시는 좋은 말씀일 테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어디서부터 뭘 어떡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양띠 말고, 호랑이띠로 태어날 걸 그랬다. 그랬다면 타고나길 용맹하기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음 매’가 무엇인가?

적어도 ‘어 흥’ 정도는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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