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분홍약과 함께하며 화학의 놀라움을 체험하고 있다. 이 찐 분홍 약을 처음 먹었을 때는 그냥 그랬다. 그리곤 다음 약시간이 조금 지나니 온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손은 알코올 중독자처럼 벌벌 떨리는데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약 3회를 먹고 나니 드디어 몸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약시간이 조금 지나도 벌벌 떨리지 않고 버틸만해졌다. 3회 차를 먹고 나니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행복한 평화는 아니지만 감정을 컨트롤해 줬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몇 옥타브씩 내려 주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불안증, 우울증, 공황장애도 다 같은 약을 쓴다는데 복약해 본 입장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개인적 소견)
불안증 약은 신경을 진정시켜서 생각이 잘 안 나고 자주 깜박하고 산만해진다. 내가
ADHD인가 싶은 생각도 심각히 해보았다. 불안증 약을 먹으면 몸이 조금 덜 아프고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지는 않다)
우울증 약은 생각은 잘 돌아가는데 감정이 무뎌진다. 그래서 덜 깜박하고 덜 산만하다. 다소 차분한 느낌이다. 문제는 모든 감정에 차분하다. ㅎㅎ. 좋은 일도 차분하고 나쁜 일도 차분하다.
나는 살아보겠다고 잠수를 선언했다.
전화기를 비행기 모드로 해놓고 나니 맘이 조금 편해졌다. 모든 연락을 끊고 마음을 조금 가다듬을 필요를 느꼈다. 이럴 땐 동굴 잠수가 상당히 도움이 된다. 나는 내지르기보다는 안으러 삭히는 타입이라 동굴이 잘 맞는다.
물론 미디어도 가려봐야 한다. 유튜브만 틀면 그분이 나와서 가슴이 미어지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보지도 않는 드라마를 틀어놨다.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다. 그래야 핸드폰에 손이 가지 않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매일매일 정리한 결과 집정리도 90%는 끝났다.
이제는 조금 여유가 돈다. 어젯밤에는 잠시 시도 한 줄 읽고 책도 들여다봤다.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해놓으니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사랑이 가득한 이 말에 전화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분은 나의 직장 사수이자 평생 함께 가는 언니이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귀신같이 알고 연락을 한다. 분명 우주인임에 틀림없다. 멀리 있어도 주파수로 다 알아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내 상태를 이야기했다. 언니는 나를 토닥이느라 여간 애를 쓰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말을 하다가 울음이 터졌다. 둘은 하염없이 울다가 웃다가.. 우리는 그렇게 거리를 뛰어넘은 해우를 다졌다.
언니가 말했다.
“영혜야 너 지금 이런 상태인 거 가족들은 알아?”
“아니, 동생하고 언니 밖에 모르지 “
“왜 언니들하고 아빠한테는 말 안 했어?”
“그냥, 불안장애로 아픈 건 아는데.. 말하기가 왠지 편치 않네.. 나 아니라도 아빠 때문에 다 힘든데, 뭐 나까지 보태”
“내 동생하고 언니한테는 비밀이 없으니 말해도 편하고, 말하면 이해해 주지만”
“오히려 말해서 불편해지는 경우도 있으니”
“영혜야 병은 알려야 해”
“그래야 너도 살아”
“괜찮아 언니”
“나 고비 넘긴 거 같아”
“진짜 이제 그런 감정 안 들어”
“그냥 슬프다 정도이지 “
“극단적으로 치우쳤던 건 지나가는 중인 거 같아 “
“에효, 영혜야 몸이 아픈 건 병원 가면 되지만, 마음이 아픈 건 약으로 안돼 “
“그러니 윤호 생각해서, 널 사랑하는 사람들 생각해서 버텨야 해”
“네가 얼마나 착하고 좋은 사람인지 네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아”
“꼭 먼저 가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 많잖아 “
“넌 그러지 마, 언니가 너무 걱정된다”
“지구에 또 하나의 초록 나무가 무너질까 봐”
“알겠어 언니”
“늘 다짐하고 있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
“언니 우리 함께 일했던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다 “
“그땐 참 티 없이 밝고 행복했는데 “
“ㅋㅋ 영혜야 넌 지금도 밝아 “
“넌 어두워진 게 아니라 잠시 아픈 거야”
“걱정 말고 이겨내자”
“언니는 니 나이에 암도 이겨냈잖아 “
“미안해 언니, 내가 아픈 언니를 챙겨야 하는데.. 거꾸로 언니가 나를 챙기네”
“괜찮아 그러니 내가 니 언니지 “
“마음 아픈 것도 암과 같아 “
“그거 감기 아니야, 미안해하거나 죄책감 느끼지 마. 네가 약해서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네가 폭우를 너무 오래 맞아서 병든 거니깐 “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너만 생각해. 그래야 니가 살아 “
“다들 자기 살길 자기가 찾아”
“그러니 넌 너만 챙겨”
“니가 있어야 다른 사람도 보이는 거야”
“언니가 또 전화할게”
“우리 아가 영혜 잘 지내고 있어”
전화를 끊고 나니 한결 마음의 온도가 올라갔다. 동굴에 있는데 누가 동굴 입구에서 장작불을 지펴준 느낌이었다. 온기가 온몸의 세포 안으로 따뜻하게 차올랐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도 너무 소중한 사람들. 그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아파서. 내 숨이 부족해서.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서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사는가 보다.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사람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렇게 나에 옷자락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행운아다. 이 분들 덕분에 나는 또 위기를 넘기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고 그리운 사람들. 행복한 시간도 추억도 함께 했던 사람들. 그들이 날 아껴주는 만큼 나도 그들에게 따뜻한 바람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