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6.11/일)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우울증_무기력의 망각의 숲>
오늘은 비교적 괜찮은 하루였어요.
비교적 덜 아프고, 덜 불안하고요.
저의 일상은 매우 간단한 편이에요.
자고, 먹고, 쓰고, 읽고, tv 보고, 유튜브 보고, 뉴스보고, 청소하고, 밥하고, 육아하고요.
지금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예요. 하던 일도 멈추고 회복에만 집중하고 있거든요. 저 같은 복합적 신경증 환자에게 모든 일상을 지탱하는 날은 매우 드뭅니다.
요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해요. 힘이 있는 날로. 왕창, 여러 가지를요. 오늘은 족발을 삶고, 딸기잼을 만들어 놨어요.
[보통의 하루]
쓰는 날+청소+육아
아픈 날+청소+육아
읽는 날+청소+육아
저의 하루는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젯밤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생각이 났어요.
“나 오늘 뭐 했지? “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는 늘 있는 통증도 두통도 약간만 있었어요.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하루예요. 불안도 우울도 못 느꼈고요. 그런데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하루종일 누워서 밥은 시켜 먹이고, 청소기도 안 돌리고요. 설거지도 안 하고요.
책도 안 읽고,
글도 안 쓰고.
종일 드라마만 봤어요.
하루 종일 누워서요.
평소에는 티브이를 봐봤자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볼까요. 보는 날에도 드라마 한 편 정도가 다인데…
“어떻게 된 거지?”
“나 오늘 왜 이런 거지?”
그때서야 바라보는 제가 나왔어요.
“너 어디 갔었어? “
“왜 내 곁에서 얘기해 주지 않았어? “
“난 너 어디 갔는지도 몰랐잖아 “
“응 나, 잡혀 있었어”
“네가 불러주기 전까지”
“네가 찾아줘서 겨우 나온 거야 “
“어디 잡혀 갔는데? “
“우울증 그놈한테”
“우울증한테 잡혀 갔으면 내가 뭘 느꼈을 텐데”
“나 오늘 비교적 괜찮은 하루였어”
“아무것도 안 한 거 빼곤”
“그래”
“우울증이 방법을 바꿨어 “
“무기력을 풀었어 “
“또?”
“응”
“무기력도 작전을 바꿨고”
“한 이삼일 좋아지나 싶었는데 “
“아냐 넌 잘하고 있어 “
“우울증이 매우 불안해해 “
“네가 자기를 떨쳐낼까 봐 “
“삶에 의문(불안)을 줘도 귀 막고 듣지도 않지 “
“아프게 하니 약 먹고 자버리지”
“긴장해야는데 그냥 산다고 ‘아 몰라’ 해버리지 “
“자기 좋아하는 글 읽고 쓰면서 내면의 힘을 채워가지”
“우울증 입장에선 미치겠는 거야”
“그래서 무기력을 강화시킨 거지“
“무기력 숲이 만들어졌어 “
“와, 대단하네 집념의 우울증이셔 “
“내가 이만큼 노력하면 떠나 줄 때도 됐잖아”
“넌 몰랐을 거야”
“너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너에게 다른 증상을 주지 않았어 “
“그럼 넌 편했다고 느끼겠지?”
“그럼 넌 날 덜 찾을 거고”
“그때 나를 잡아 간 거야 “
“그리곤 넌 내가 없는 걸 모르지 “
“넌 증상이 없으니 괜찮은지만 아는 거야 “
“그게 우울증에 작전이야 “
“무기력이 일상을 지배하되 불쾌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거”
“결국은 하루종일 무기력이 지배한 하루가 된 거지 “
“그러는 사이에 넌 또 열심히 채운 희망과 의욕을 빼앗기고 있는 거고 “
“너의 의식을 망각시키는 무기력의 숲이야”
”와~“
“두뇌싸움하는 거 같네”
“나도 지능이라면 꽤 괜찮은 편인데, 우울증 애 정체가 뭐야?”
“또 다른 너”
“뭐라고? 나라고?”
“응, 너라는 인격 안에 긍정과 열정만 있을 거 같아? “
“본능과 선의만 있을 거 같아?”
“우울증 개도 본능이고, 네가 모르는 너의 다른 인격이야 “
“그러니 지능으론 못 이겨”
“우울증도 너만큼 머리를 쓴다는 얘기야“
“그럼 어떻게?”
“늘 날 찾아”
“나도 너잖아”
“너보다 객관적으로 너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
“우리는 다 같고 또 달라”
“싸울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야”
“네가 온전히 너를 사랑으로 채운다면 모든 건 조화롭게 제 자리로 돌아갈 거야”
“겁먹지 마 넌 잘하고 있어”
“안 아픈 날도 가끔 하루 종일 누워있을 수 있어”
“그러니깐 영혜야 나를 잊었을 때도 잊지 마”
“너를 사랑하는 일만이 모든 치료의 방법이야”
“사랑으로 약을 먹이고, 재우고, 일으키고, 움직여, 너의 상처를 마주해 “
“유리 바닥을 밝고서라도 피나는 발로 걸어 나와야 해”
“네가 서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너만이 해낼 수 있어”
“너만이”
“고마워”
“어쩐지 나 다시 불안해지고 있어”
“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