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10.26/목)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by 이음

<우울증_또 다른 희망이 생겼다>


유난히 힘이 없는 날이었어요. 그래도 병원 가는 날이 일주일이나 늦은 상태라 꾸역꾸역 일어났습니다. 무기력이 삼켜 버린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끌어 오기까지 내부의 갈등은 내심 치열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휴~일단 애기가 학교에서 독감이 걸려 왔어요. 그래서 식구별로 셋다 걸렸고요. 셋다 아픈데 제가 다 간호하느라 더 힘들었어요. 선생님"


"ㅎㅎ 그게 어쩔 수가 없어요. 요즘 학교가 격리도 안 하고 방역도 안 해서 독감 한 명 걸리면 마스크도 안 쓰겠다... 전체 다 도는 거죠"

"가족이 다 아프면 엄마도 아프지만 엄마가 제일 고생이죠"

"힘드셨겠네요. 그래 요새 잠은 어떻게 주무세요?"


"엄청 잘 자요. 하루에 두세 번이요."


"그럼 밤에는 어떻게 주무세요?"


"밤에도 또 잘 자요. 낮에 다 자고도요"


"아이고 평생 주무실 거 한꺼번에 다 주무시고 계시네요"

"아직도 수면이 불규칙하시네요"


"네에~"


"요즘 감정은 어떠세요?"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이요?"


"음~불안이나 짜증이 오르락내리락한다든가?"

"아님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으니 일관성 있게 쭉 평행선을 유지한다든가요?"


"아, 생활에 불편함이나 불안할 요소가 딱히 발생하는 건 없는데도요. 무기력이 쭈~~~~~욱 유지되고 있습니다"

"정말 제가 왜 이러나 모르겠어요. 제 스스로 이해가 안 돼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아요. 선생님"

"그렇다고 우울하고 죽고 싶고 이런 감정은 아닌데요.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아요"


"아, 좋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병원 다니신 지 1년 넘으셨잖아요. 마라톤 선수가 경기를 끝내면 축 쳐지겠죠? 그거처럼 뇌가 평생 쓸 혼란을 1년 동안 다 겪은 거예요. 그러니 이제 지친 거죠. 휴식기에 들어선 겁니다"

"이 시기를 잘 넘기면 회복기로 올라서실 거예요"


"아! 그래요?"

"어머나,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주부터 미션을 2개 드릴 거예요. 잘 들으세요"

"1번째-매일 산책을 하세요."

"2번째-점심 안정제를 한번 줄이든 반만 드시도록 약을 줄이도록 노력하세요"

"아셨죠? 제가 미션 두 개 드렸어요. 뭐라고 했죠?"


"매일 산책하기, 약 줄이기요"


"좋아요. 이제 상담치료, 약치료에서 행동치료를 하나 더 추가하니깐 내년 봄에는 좀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 거예요"

"함께 노력해 봐요"


"네, 선생님"


"일단 약은 비상시를 대비해서 똑같이 드릴 거예요. 점심약을 잘 조절해 보세요"


"네 선생님"


"그래요. 이 주 후에 뵐게요"


사실 우울증의 희망고문에 지쳐 있었어요. 그런데 다시 진료실에서 희망의 날개를 달고 나왔네요. 웬만하면 큰 기대 없이 살려고 했는데...

선생님 말씀에 살짝궁 가슴에 햇살이 내리쬐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깔아내리는 무기력이 오히려 충전의 시간이었다니...


역시 알 수 없는 영역이에요. 샘이 그렇다면 그런 게 아니겠어요. 그렇담 저는 살포시 다시 희망을 품고 살아봐야지요. 산책도 다시 나가고 꽃사진도 다시 찍고 은행나무와 대화도 해봐야겠고요.


내년봄엔 어떤 연두색 물감을 풀어 잎색을 낼 것인지? 은행 열매 냄새는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비밀을 알아내야겠어요.


그래서 은행나무 열매의 억울함도 좀 풀어 주고요. 오지랖도 좀 부려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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