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드업 중입니다.

마라톤도, 나의 두 번째 막도

by 라고머 리지

[작가의 노트] 지난 주말 10k 마라톤, 계획대로 되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그래도 결국엔 나였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이름이 불렸습니다.



위는 아직도 뒤집혀 있었고,

다리는 무거웠고,

기록은 목표에 한참 못 미쳤는데...


여자 10k 4위. 단상 위로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 손을 내저었을 것입니다. 3위까지의 기록과 내 기록 사이에는 꽤 큰 간격이 있었고, 그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그냥 올라갔습니다. 위가 뒤집혀도 완주했고, 어쨌든 호명됐고, 그러면 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상품으로 서큘레이터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부피도 크고 내가 살 만한 성능의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오늘 목표는 10k 45분 언더였습니다.


작년 11월 하프 대회에서 목표였던 1시간 45분을 훌쩍 넘어 1시간 42분 31초를 찍은 후, 올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2월 10k 45분 언더,

4월 하프 1시간 40분,

그리고 10월 생애 첫 풀마라톤 3시간 45분 언더.


하나씩 쌓아가는 빌드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위경련이 왔습니다. 일주일 전 혼자 뛴 시뮬레이션 런에서는 46분 20초가 나왔는데, 오늘은 몸이 그때만큼도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6킬로를 넘어가면서 위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페이스를 올리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그냥 완주하자. 그 생각 하나로 마지막 4킬로를 버텼습니다.


결과는 47분 05초.


기존 PB와 거의 비슷한 기록이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당연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고, 완주했습니다.



사실 요즘 제 삶도 비슷한 국면입니다.


작년 7월, 21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쳤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내 소득 없이 살림을 꾸려가면서, 나는 나대로 두 번째 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당장 완성된 무언가를 내놓는 것보다, 지금 이 시간을 제대로 쌓아가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면서요.


7년째 달리고 있고,

21년 영업을 했고,

올해 1월 브런치 작가에 한 번에 선정됐습니다.


살다 보니 이 모든 경험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의 재료가 되어 있었습니다.


억지로 연결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쌓여 있었습니다.



마라톤 훈련을 하다 보면 빌드업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풀마라톤을 뛰기 위해 처음부터 42킬로를 연습하지 않습니다.


10k를 먼저 안정적으로 완주하고,

하프를 소화하고,

그 위에 풀마를 얹습니다.


지금 제 삶이 딱 그렇습니다.


오늘 47분 05초도,

예상치 못한 4위도,

뜬금없이 받아온 서큘레이터도.


다 그 빌드업의 한 장면입니다.


4월 하프 대회 신청도 오늘 마쳤습니다. 1시간 40분. 해볼 만합니다.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에는 핑계를 찾고,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을 찾는다."


오늘 레이스 중에, 단상 위에서, 서큘레이터를 손에 들고 걸어 나오면서. 몇 번이고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위가 뒤집혀도 완주하고 싶었고, 그래서 방법을 찾았고, 완주했습니다.


두 번째 막도 그렇게 가면 됩니다.


결국엔 나입니다.


오늘도,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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