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인사
아파트마다 승강기 인사 문화가 다른 걸로 알고 있다.
친구들에게서 어디서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는 청소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학교 캠페인일 거라고 했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도 중고등학교가 있어서 학생이 많지만 우리 아파트에는 그런 문화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오면 계단으로 가거나 (이건 아마도 코로나 이후 바뀐 것일 듯) 입을 꾹 닫거나 최선을 다해 피하는 문화는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요즘엔 내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걸 봤는데도 문을 재빠르게 닫는 행동이 기분 나쁘지가 않다.
주말에 위층이 이사를 들어왔다. 동네 생활 소음에 예민하지 않아서 몰랐을 뻔했는데 환기하려고 창문을 열어놓았다가 이삿짐 나르는 소리에 알게 됐다.
월요일 아침.
아이 학교를 보내려고 같이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위층에서 사람이 탔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겠다.
곧 승강기문이 열렸고 청소년이 혼자 타고 있었다. 못 보던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이사 들어온 집일 가능성이 커졌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만 해도 여느 다른 날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그 청소년이 인사를 했다.
나는 주변에서 알아주는 ‘당황하지 않는’ 성격이라 (생방송 최적화) 인사를 받아 ‘네~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했다. 2년 만에 이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 인사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아이 눈엔 이게 이상했다.
‘엄마, 누구야? 왜 모르는 사람이랑 인사를 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오빠가 인사를 하면 우리도 인사를 해야지.’
이 이야기를 그 학생이 다 들었고 내릴 때도 ‘안녕히 가세요.’라며 밝게 인사하며 내렸다.
솔직히 말하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오빠가 어쩌고 저쩌고' 따위의 내 대답은 내 아이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인사를 한 청소년이 들었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
저 학생이 우리 아파트에는 인사하지 않는 문화(?)가 있다는 걸 늦게 늦게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 등교시간.
또 위층에서 승강기가 섰다. 그 청소년이 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어떻게 적응했을지 궁금했다.
오늘 나에게 인사를 할지 안 할지도 궁금했다.
우리 층에서 승강기 문이 열렸고
학생은
지난 주보다 더 밝게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나도 지난 주보다 더 큰 목소리로
"네엡!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내릴 때에도 학생은 "안녕히 가세요!"라고 했고
나는 이번에는 심심한 '안녕히 가세요' 대신 "좋은 하루 보내요!"라고 답했다.
진심으로 그 학생이 좋은 하루를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표현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7168189
서구와 우리의 인사 문화 차이를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구에서는 낯선 사람과 함께 살아야 했던 역사가 꽤 됩니다. 타인과 더불어 잘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압니다. 특히 공공 영역에서요. 대표적인 방법이 인사지요. 가정과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킵니다. 우리 사회는 다릅니다. 예전 마을 공동체 시절엔 누가 누구 집 자식인지 잘 알고 지냈습니다. 그 속에선 인사 잘하고 예의도 잘 지키지요. 하지만 요즘엔 모르는 사람과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파트는 특히 그렇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지내게 됐는데 그들과 잘 지내는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다정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겐 무관심하고 때론 무례합니다.”
오해말자. 이 글은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인사하자는 캠페인성 글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내 아이에게는 동네 할아버지, 동네 아저씨, 동네 청소년 오빠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말고 CCTV가 잘 보이는 곳에 서 있을 것이며 그들이 길을 묻거나 예쁘다고 칭찬해도 대꾸도 하지 말고 집으로 뛰어오라고 교육한다. 아이를 나 같은 어린이 성추행 피해자로 만드느니 싸가지 없는 아이 소리 듣게 하는 게 낫지 싶기 때문이다.
다만 인사를 하는 윗집 오빠에게는 답을 해도 된다고, 오빠가 아침 등굣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안녕?'이라고 하면 '오빠도 안녕?'이라고 해도 된다고,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이 말할 뿐이다. 아이가 평생 살아온 영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시키지도 않고 이래저래 어린이에게 불리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피해자의 신고, 진술 위주로 수사가 진행되는 반면, 한국의 수사는 가해자 검거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피해자에 대한 추후 상담과 보호는 말할 것도 없겠다.
윗집 아이가 바르게 인사를 했을 뿐인데 이 글이 이렇게 끝나는 게 맞나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