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짧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따위의 제목을 생각해보다가 결국 생각이 늦은 걸로 정리하기로 했다.
방금 있었던 일이다.
오늘까지 반납해야 하는 도서관 책들이 있어서 아침부터 종종거렸다. 아이는 혼자 등하교를 하니까 데려다줄 필요는 없지만 아이가 나갈 때 같이 나가면 도서관이 여는 시간과 딱 맞아서 그랬다. 아이가 엄마한테 같이 가자고 바삐 움직인 게 아니라 내가 아이와 같은 시간에 나가려고 종종거린 셈이다.
이따 만나, 교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린이도서관 쪽에서 아이가 2주 전에 빌린 책들을 반납하고 또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골랐다.
매달 마지막 주에는 평소에 빌릴 수 있는 양인 7권보다 두 배 많은 14권을 빌리게 해준다.
이럴 때는 내가 읽을 책도 맘껏 양껏 고를 수 있어서 신이 난다.
두꺼운 책, 표지가 예쁜 책, 새 책, 헌 책 다양하게 골라 14권 야무지게 채워 천가방에 넣고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서 13분 거리이다.
하지만 나는 161cm 48kg 마른 체형의 40대이다. 근육은 1도 없고 입만 살아서 바다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뜨는 게 아니라 입부터 먼저 가라앉을 거라는 농담을 한다. 그 와중에도 해양생물들하고 수다 떨어야 되어서...
그나마 한쪽 어깨를 짓누르는 14권의 책을 이따 읽을 거라는 생각이 아픔을 덜어줬다. 아.. 아침이라도 먹고 나올 걸. 어지럽네. 얼른 가서 아침 먹어야겠다.. 등등의 생각을 하던 찰나, 허리가 구부정한 말 그대로 꼬부랑할머니가 말을 건다. 전문의학용어로는 '척추관협착증'이라고 한다.
- 저기.. 여기 동사무소가 어디예요?
처음 든 생각은 '동사무소'라는 말이 이제 '주민센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라떼는 동사무소였는데 언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흥미로운 건 읍사무소와 면사무소는 여전히 '사무소'이다. '동'만 '동주민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길 물어보는 할머니를 붙들고 동사무소가 주민센터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대답한 말은 다른 거였다.
우리 동네에는 1동 동사무소와 2동 동사무소가 있어서 어느 동 동사무소를 말씀하시는 건지 되물었다. 할머니는 그건 잘 모르시고, 그냥 3층에서 한글을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던데 혹시 그 장소에 대해 아냐고 다시 물으셨다.
- 거기서 그런 수업을 하는지 저는 잘 모르는데요, 여기서 가까운 주민센터는 길 건너셔서 나오는 첫 번째 건물이에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어어기 보이세요? 저 건물이거든요? 길은 여기서 건너시는 게 나아요. 저쪽으로 가시면 횡단보도를 좀 돌아서 가셔야 해서.. (아아 어깨가 빠질 것 같아!!!)
- 아, 네 고마워요
이렇게 우린 헤어졌다.
여기에서 생각이 끝났으면 내가 브런치를 안 열었을 거다. 지금쯤 소파에 누워 빌려온 책을 읽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집에 거의 다 도착하려고 할 때쯤 번뜩 든 생각이 지금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건 바로.
만약 할머니가 한글을 모르시는 거라면... 저 건물을 지나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글을 읽으신다고 해도 주민센터가 동사무소라는 걸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 나름대로 가까운 거리인데 주민센터를 못 읽으셔서 길을 한번 더 건너면 어쩌지.. 거기 아닌데... 으으으 모셔다 드렸어야 했어!!
그리고 14권의 책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와서는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늦은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는 한글을 모르실 수 있다. 그런 수업을 거기서 하는 게 맞냐고 물었으니. 그리고 어쩌면 가족들에게 민망해서 혼자 나오셨을 수도 있다. 조용히 배우고 오시려고. 그동안 웹툰도 보지 않던 내가 요즘 아이돌을 좋아하는 할머니 이야기'를 다룬 <팬인데 왜요>를 보고 있는데도, 그 이야기에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나오는데도 그 생각을 못 했다. 그냥 어깨가 빠져도 길을 같이 건너고 모셔다 드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나는 후회가 짧은 편이다. 매 결정에 최선을 다한다고 믿고 살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알아서 잘 가셨을 거라고 찰떡 같이 주민센터를 알아봤으며 지금쯤 가나다 수업을 듣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번 후회는 몇 시간 더 할 것 같다. 내가 결정한 사항이 아니라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깨가 아파도 할머니를 모셔다 드린다 VS 길을 자세히 알려드렸으니 그냥 집에 간다, 이 선택에서 내가 집에 가는 걸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점이 후회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거기서 그 생각을 못할 수가 있지??????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