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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Jun 14. 2022

단편

나는 가끔 글을 갈겨

시작은 늘 배경묘사로 하리라 생각해왔다.



암막 커튼을 쳤어도 이미 뜬 해가 길지 않게 비집고 들어오는 방이었다. 유정은 나라면 커튼을 좀 더 길게 맞췄을 텐데, 라며 이집에 살던 동유럽 여자를 탓해본다. 어중간한 길이에다가 고급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저급하지도 않은 갈매색 커튼을 젖히면 내가 바로 진짜 초록이다! 하고 외치는 나뭇잎들이 부끄러움을 타는 소녀처럼 온몸을 배배 꼬고 있다. 유리창을 가로막고 있는 진짜 나무 때문인지 커튼의 색은 늘 가짜 같았다. 온몸을 비비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유정은 어차피 가짜같은 색이라면 다음엔 진짜로 가짜 같은 색의 커튼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난 기척을 하자, 밤새 오줌을 받아내느라 아래로 축 처진 기저귀를 무겁게 매달고 아이가 방으로 달려온다. 아침 해가 뜨면 눈이 자동으로 떠지는 유정의 아이는 엄마보다 진작에 먼저 일어나있었다. 거실에는 동화책이 몇 권 펼쳐져 있고, 배터리가 다 된 아이의 태블릿은 바닥에 내팽겨져 있었다. 유정은 빨간색 고무찰흙이 아이 손톱 밑에 끼어있는 걸 보고는 자기 손톱을 세워 아이 손톱 밑을 훑었다. 아직 말랑말랑한 걸 보니 아이가 자기보다 먼저 일어난 지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은 세 살 배기 아이는 먼저 일어났어도 엄마를 깨우지 않는다. 엄마가 일어나면 하기 싫은 아침세수를 해야하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배터리가 닳도록 태블릿을 실컷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배고픔을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를 빼고는 아이는 자고 있는 엄마를 깨우지 않았다.



"커튼에 무슨 숨은 뜻이라도 있어?"

유정의 오랜 친구, 인이 물었다.

"독자가 커튼에 어떤 의미를 두고 읽어야 하는 건가, 뭐 이말이야."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평소에 늘 생각한 게, 시작은 배경 묘사로 하고 싶었는데 내가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커튼 달린 유리창이고, 또 그 뒤에 우거진 나무가 있으니까 뭐..."
"음... 그러니까 소설의 시작을 작가의 하루의 시작과 동일시한다, 뭐 그런 건가?"

인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유정의 딸은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깨는 아이였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영국은 여름엔 해가 길고 겨울엔 해가 짧았다. 그래서 아이는 여름엔 잠이 부족했고 겨울엔 지나치게 잤다. 빛이 들면 깨고 어두우면 잔다는 얘기인데 일년에 한번,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도 그랬다. 비행기 안의 불이 꺼지면 잠들고 불이 다시 켜지면 잠에서 깼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를 일부러 재우려고 애쓰지 않았다. 해는 늘 때가 되면 지고, 비행기 안의 불빛도 영국과 한국을 오가는 12시간 내내 밝게 켜두지는 않으니까.

"Breakfast 먹을까?"

아이가 입을 열었다. 두세 살 아이들은 갑자기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어디서 들은 말을 그대로 하거나 어디서 들은 말을 다 분해해 풀어놓고 마음대로 다시 조합할 뿐.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문장, 또는 영어이기도 하고 한국어이기도 한 문장을 내뱉는 아이는 그저 아침마다 엄마가 하던 말을 그대로 따라할 뿐이었다.

유정은 바짝 마른 눈곱이 눈에 붙어 불편하다고 느꼈지만 자기보다 먼저 일어나 한바탕 놀고 있었던 아이의 배고픈 상황이 더 불편하게 느껴져 세수도 하지 않고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걸 차려줄 것도 아니었다. 시리얼에 찬 우유. 거기에 아이가 좋아하는 숟가락을 꽂아주면 끝이었다. 한국에 살았어도 이렇게 했을까, 영국인 엄마들은 느끼지 않을 죄책감을 아침마다 느끼는 그녀였다. 그래도 나는 가끔 우유는 데워서 주잖아,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자기가 먹을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었다.

토스트기?
왜.
토스터 아냐?
그건 영어잖아.
그럼 토스트기는 한국어냐?
그럼 빵굽개라고 할까? 드라이어를 드라이기, 머리 말리개라고 하는 것처럼?
빵굽개 신선한데?
됐어, 계속 읽어봐.

철컹.

빵이 다 데워졌다. 철컹, 하고 감옥의 철창이라도 닫히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이 토스터는 남편이 사다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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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글을 쓴다..기보다는 갈긴다고 해야 더 맞을 것 같은데

이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할 독자가 있을까 

based on a true story but this story is not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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