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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Jun 20. 2022

우리말 놔두리?

아니면 영어를 놔두리

- 엄마가 <우리말 나들이> 방송 작가면 아이가 외국에 살아도 한국어는 뭐 문제 없겠네?


문제 있다. 우리말 나들이가 아니라 우리말 놔두리다. 완전 놔두고 있다.


나는 교포 남편을 따라 살게 된 해외에서 아이를 낳았고 또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들으면 재수없어 하겠지만 (아니지, 때가 어느 땐데 박찬호가 한국어 발음 좀 꼬였다고 재수없어 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니? 얘들아?)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육아 용어도 잘 모르고 국민 육아 용품도 잘 모른다. '유모차'보다 '버기, 푸시체어' 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아이가 위험한 일을 하기 직전, '안 돼!!' 보다 'No!!'가 먼저 튀어나온다.  


하지만 현직 작가이고 한글로 글을 써서 버는 직업 16년 차인데, 아니 직업 얘기할 것도 없고 하고 있는 프로그램 얘기할 것도 없다. 그냥 한국인 경력이 수십년인데.. 내 아이가 한국어를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언어를 모르는 상태로 태어났을 때, 나는 영어를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하면 될 것을 뭐하러 2개월짜리 애한테 알라뷰~ 하고 있나. 아이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나와 대화할 때 쓰는 언어인 한국어로 아기를 대했다. 그런데 한국인이 살지 않는 동네이고, 시간이 갈수록 영어만 하는 친구들만 늘어났고 결정적으로 너서리Nursery에(4살) 들어가자 아이는 한국어를 멈추었다. 아이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혼자만 한국어 쓰고 영국 선생님들의 말을 혼자만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냐며 그는 아이에게 영어만 썼다. 어쩌다보니 <한국어는 엄마만 쓰는 언어, 하지만 엄마는 영어도 알아듣는 사람, 그러므로 나는 영어만 해도 엄마는 내 말을 알아듣는다>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지 못한 위의 글은 2019년 3월 7일에 저장되어있던 것이다. 임시저장글와 같은 브런치의 '작가의 서랍'에서 방금 발견되었다. 오늘은 2022년 6월 20일이다.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어서 저 글은 원래 의도대로는 끝을 맺지 못하고 오늘 글의 시작으로만 쓰이게 되었다.


코로나19가 생기고 여러 가지 일을 겪은 우리 가족은 2020년 6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은 작가의 서랍에서 발견된 위 글과 완전히 반대인 걱정을 하고 있다. 아이가 영어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엄마 대신 마미, 마미, 하던 아이를 일반 사립 유치원에 넣었다. 공립엔 자리가 없었다. 영어 유치원도 생각하긴 했으나 지금 당장 한국에서 필요한 것이 한국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가나다라는 하고 초등학교를 보내야 할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야생에서(?) 친구들을 통해 한국어를 습득한 아이는 언제부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와. 엄마래. 신기하다. 두세 살 때 듣고 오랜만에 들어본 엄마라는 호칭. 반갑다.  


이제 아이는 매우 다급한 상황에서만 갑자기 영어가 튀어나온다. 몇 달 전 무심코 집어 먹은 회전초밥에서 고추냉이를 씹었을 때 I NEED WATER!!!라고 소리를 지르던 게 내가 들은 아이의 마지막 영어다.


코로나가 진정이 되자 아이 아빠는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나와 아이를 한국에 두고 갈 셈이다. 나는 반대하고 있지만 이건 사생활이니 나중에 정리를 해서 밝혀둘 참이다. (누가 궁금해 한다고.. ㅎ 사실 내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적어두는 편)


그런데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아이 영어 고민은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회복탄력성은 어마무시해서 돌아가면 다시 영어를 하게 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2년 동안 깨친 우리말은 모르겠다. 과연 잊을까? 해외에서 나고 자란 게 전혀 티가 나지 않게 된 지금의 쟤가 한국어를 못하게 될까? 아닐 것 같은데..


그러면 다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학교를 계속 다닌다면 어떨까. 그래서 영어 걱정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한국 초등학교에서는 3학년부터 영어 과목이 생기나본데 내 아이는 영어 학원이라는 것을 다녀본 적이 없으니 과연 과목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에? 다니고 있지 않아요? 하실 분들을 위한 덧붙임 https://brunch.co.kr/@egeve23/65 2021년에 영어학원에 넣어 보려고 레벨테스트를 본 이야기. 그런데 이 학원에는 결국 보내지 못했다. 학원이 며칠 뒤에 사라졌기 때문에. 널린 게 영어학원인데 골라도 참.)  


결론.

해외에서 태어나 해외에서 자라다가 유치원 때 한국에 와서 현재 초2 생활을 한국에서 하고 있는 아이의 한국어와 영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엄마였다가 마미였다가 다시 엄마가 된 내가 이 아이의 언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아파트 단지 안 푯말에 '노인정'이라고 쓰여있는 걸 보면서

"No 인정.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지."라고 말하는 아이.

넷플릭스는 한글자막보다 영어 음성과 영어 자막으로 봐야 훨씬 편하다고 말하는 아이.

초등 국어 교과서 관련 학습지는 4학년 걸 풀고 있는 아이. (본인이 고르고 본인이 스스로 푸는 중. 하라고 아무도 안 시킴)

한글로 작은 이야기는 뚝딱뚝딱 만들어내면서 영어 한줄 쓰기는 힘들어 하는 아이.


아이를 가두리 양식으로 키울 건가 놔두리 양식으로 키울 건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이 원래부터 없는 걸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아이가 알아서 말하고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믿고 놔두면 어떻게 될 지 잠시 지켜볼 수 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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