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경험을 했다.
어제 낮에 동네 작은 공원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아이 친구와 놀았다.
집에 오후 다섯 시쯤 돌아왔는데 그때 바람이 참 시원했다.
다섯 시는 낮에 실컷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좋은 시간이 아니라
밖에서 놀기 좋은 시간이구나, 다음엔 더운 두 시에 나오지 말고 선선한 다섯 시에 나와야겠다.. 생각하며 집으로 왔다.
이상한 일은 세 시 반쯤 일어났다.
우리는 갓난아기부터 초등학생 2학년까지 모두 7명이었고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또 다른 4명이 옆 벤치에 있었다.
총 11명이었다.
내가 왜 이 숫자를 굳이 언급하는지는 나중에 나온다.
옆 벤치와 우리는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그냥 옆에 앉아있는 사이였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본다면 어쩌면 한 그룹이다, 할 수도 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한 자리에 서서 줄넘기를 뛰고 있었고
옆 벤치 아이들은 하늘로 물총을 한번 뿅 쏘고는
우와 예쁘다 비오는 것 같아
하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불까불 유치원생 아이들이 앞뒤옆사람을 보지 못한 채 뛰면서 부딪히고 서로 총구를 겨누며 옷은 다 젖어서는 으하하하 잡아라~~ ABCD에 TNT 따위의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서로 총구를 겨누며 물총을 쏘고 갖고 놀았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동네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 아이들 옆으로 목줄은 있지만 입마개는 없이 대형견을 산책시키는 (나보다) 젊은 남자가 있었다.
울산에서 최근에 있었던 개물림사고 때문에 모두가 예민해진 시점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 순간 일시정지하였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배운대로 지나가는 개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만지지 않는다, 등등의 에티켓을 성실히 지키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있던 우리가 예민해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그 남자가 예민해졌다.
아이들을 향해서 미친듯이 눈빛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응?
알고보니 옆 벤치 아이들이 하늘로 쏜 물총의 물이 자기가 산책시키던 개의 꼬리에 닿은 모양이었다.
눈으로 온갖 욕을 다 하며 그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선 개의 꼬리를 연방 어루만지면서 그 어린 아이들을 째려보는 것이었다.
키 큰 성인 남자가 대형견을 멈추어 세우고 자기 아이들을 째려보고 있으니 (소싯적엔 야린다는 말도 했었는데 이 남자에겐 그게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옆 벤치 어른들도 상황을 인지하였다. 옆 벤치 아이 엄마는 아이를 불러서 질문을 했다.
"00야, 혹시 물총을 개한테 조준해서 쐈니?"
"아니?"
"(뭐지 저 남자?) 혹시 싶어서 물어본 거야. 알았어, 계속 놀아."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목격자이고 공원이라 시시티비도 있을 터.
그 아이들은 하늘에 물총을 쏘며 '비온다'며 놀고 있었고 하필 그 옆을 지나가던 그 남자가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묻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분명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할 눈빛은 아니었다. 그 남자의 거친 눈빛과 불안한 우리들은 한참을 그렇게 대치하다가 그 남자가 포기한 듯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나는 다섯 시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가 11명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또는 우리 11명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성인 남자가 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생각이었지만 자꾸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그 분도 브런치 작가라서 같은 시각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지도.
"평화로운 주말 낮에 순하고 순한 우리 댕댕이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념없는 잼민이들이 우리 댕댕이를 겨냥해서 물총을 쏘고 있었다. 물을 극혐하는 우리 댕댕이의 꼬리가 다 젖은 것이었다! 나는 정말 화가 많이 나서 눈으로 욕을 하며 공공장소에서 애들 단속을 하지 않는 맘충들을 쳐다보았지만 쪽수가 모자라서 그냥 따지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한민국 싫다!"
결국 지금 모두가 너무 예민한 것이다.
혹시 그게 매우 더운 여름날의 오후 세 시 반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바람이 솔솔 부는 다섯 시였다면 그 남자도 갑자기 흩뿌려진 미스트에 대해서 화가 덜 나지 않았을까.
나는 어떻게 해서는 모두를 이해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며칠 전에 옆 동네에서는 9살 초등생이 호수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나도 자주 가는 곳이라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어제 우리가 놀던 그 공원에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연못이 있다. 충분히 익사가 가능한 연못이란 이야기다.
어제도 일부 중학생들이 연못 쪽으로 울타리를 넘어서 놀려고 해서 잔소리를 보탤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예민했기 때문이다.
"엊그제 어린이 익사 사고 난 거 알고 있니? 여기는 아니지만 울타리가 있다는 건 들어가지 말라는 뜻이니까 하지 말자."
다행히 이 중학생들은 거친 눈빛 대신 우리의 말을 들어주었다.
네, 하며 울타리를 내려와 다른 곳으로 갔다.
나는 연못에서 허우적거리는 영유아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허우적거리는 덩치 큰 15세를 구할 힘은 없다. 그 힘으로 예민하게 잔소리를 하는 것이 낫다.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라 성인 남성이 어린이들에게 '개한테 조준해서 물총을 쏘면 안 된다'라고 훈육하는 것을 나쁘지 않게 생각할지는 몰라도(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닐 뿐더러) 탁 트인 공원에서 약간의 미스트를 자기 개가 맞았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눈깔을 부라리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예민미를 발휘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예민하게 구분해야 하는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