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맞이
"어머, 너 낯꽃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겨우 곰삭은 동생이 있었는데 요즘 못 챙겨줬더니 내게 서운하대."
"쯧, 네가 넘놀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안 그래도 걔한테 서머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
위의 대화가 완벽히 이해가 된다면 평소 '우리말나들이'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일 겁니다. 낯꽃, 곰삭다, 넘놀다, 서머하다. 모두 사전 속에서 콜콜 자고 있던 말로 우리말나들이에서 깨워본 적이 있는 낱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말나들이를 평소 잘못 쓰고 있는 틀린 말을 바르게 고쳐주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계실 텐데요, 맞습니다.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하자고 하면 '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썼어요?'라면서 지레 겁을 먹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말나들이는 사전에 있지만 평소에는 잘 쓰이지 않아 죽은 말(死語)이 되어버릴 고비에 있는 낱말들을 살려 쓰자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맞춤법을 제대로 아는 것 못지않게 우리 고유의 말에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전 속의 우리 고유어를 잘 살펴보면 굳이 외국어에서 갖다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뜻이 충분히 통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말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잘 쓰게 되지 않아서 없어지는 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회는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데 그만큼 말글생활은 다양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고유어를 통해 우리말을 풍부하게 만들어보려는 노력 하나와 관심 하나가 아쉽습니다.
1) 친구에게 얼큰이, 대두(大頭), 왕대가리라며 놀리면 안 되지요.
2) 친구에게 좁쌀과녁이라며 놀리면 안 되지요.
국보1호를 우리말(한글)로 바꿔야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가치가 있는 우리말, 새로운 말을 만들거나 외국어에서 가져다 쓰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이미 갖고 있는 고유어를 다듬고 살려 쓰며 가꿔나가야 합니다. 우리말나들이를 통해 사라지는 고유어를 살려보자는 이야기를 나눈 문인(文人)들이 있습니다. 창작을 위해서라도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낱말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작가들은 그만큼 우리말과 친할 겁니다. 우리말과 친한 작가들과 함께 하는 그 이야기는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가 이외수는 우리말나들이를 통해 우리말은 정신의 양식(糧食)인데 음식은 신선한 걸 찾으면서 말을 그렇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썩은 음식은 입에 담지 않으면서 썩은 말은 입에 담는 경우가 흔합니다. 정신의 양식인 우리말도, 매일 먹어야 하는 밥처럼 신선하고 생생하게 또 건강하고 건전하게 쓰도록 애써야겠습니다. 어원을 알 수 없는 오염된 말을 만들어내 두루 쓰기 전에 혹시 꼭꼭 숨어있는 우리 고유어는 없는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해(誤解)하지 않는 것과 곱새기지 않는 건 같은 겁니다.
우리말을 사랑한다는 어느 치과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엔 '정수기(淨水器)' 대신 '마중물'(물이 잘 나오지 아니할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위에서 붓는 물)이 있었고 '치아미백실(齒牙美白室)' 대신 '이 하얗게 하는 곳'이, '치료실(治療室)' 대신 '이 바르게 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소설가 공지영은 우리말나들이에 출연해 영어를 쓰는 게 멋져 보이는 게 아니라 우리 고유어 하나를 더 살려 써보려는 모습이 더 멋진 거라고 말했습니다. 모르는 영어 낱말만 사전을 뒤적이지 말고 모르는 고유어도 사전을 뒤적이는 버릇을 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고유어 하나를 살려 쓰는 것보다 영어 낱말 하나를 더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어를 한마디 더 하는 것보다 삶 속에서 고유어 하나를 더 살려 썼을 때 고상해 보이고 유식해 보인다는 생각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친구에게 부개비잡혀서 숙제를 대신 하게 생겼다.
소설가 정이현이 소개한 고유어 가운데 ‘부개비잡히다’가 있습니다. 하도 졸라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된다는 뜻인데요, 어느 영어 낱말을 보며 ‘이렇게 복잡한 뜻을 한 낱말에 압축하다니!’라고 놀라기 전에 우리말에도 그런 것들이 충분히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도록 사랑받는 방송인 중에는 정확한 발음으로 바른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말에 전달력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방송에서 모두가 흔히 잘못 쓰고 있는 말을 어떤 한사람이 제대로 쓰고 있다면 제대로 쓴 그 낱말 하나로도 그 사람에게는 믿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듯 방송을 통해 고유어 하나가 툭 튀어나왔을 때 어색해하거나 넘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다시 써보는 용기가 (이런 것에 ‘용기’를 써야하는 게 안타깝지만) 샘솟기를 바랍니다.
소설가 이순원은 우리말나들이 촬영 후, 한 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글을 냈습니다.
……우선 내가 우리말로 글을 쓰는 작가이고, 또 어린 시절 라디오를 통해 국어학자 한갑수 선생이 매일 삼사분가량 방송하는 ‘바른말 고운 말’을 들으며 자란 추억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매일 그 방송을 듣다 보니 알게 모르게 우리말에 대해 어떤 것이 바른말이며 또 고운 말인지 저절로 배우게 됐던 것이다.
그 1분짜리 방송을 찍기 위해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만도 여섯 사람이었다. 더운 여름날 야외에서 그것을 찍으며 문득, 잊혀져가는 우리말 하나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되살려 환기시키는 데 이렇게 많은 인력과 공력과 장비가 투입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세계일보 이순원 칼럼 가운데 일부]
잊혀져가는 우리말 하나를 환기시키기 위한 노력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유어 한마디가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잊혀져 가는 기억을 잠시라도 붙들어 보려는 조금의 애. 그리고 관심입니다. 애쓰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어떤 말들은 결국 아무리 깨워보려고 해도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전에 있는 고유어라도 이른바 '외계어' 못지않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도 많습니다. 쓸만한 좋은 말을 고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고유어를 무조건 널리 쓰자는 말이 아닙니다. 쓰지 않는 걸 쓰레기통에 버리기 전에 재활용할 생각을 해보자는 겁니다. 외계어는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고유어는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외래어나 외계어를 쓰면서 어색한 건 당연한 거고 우리 고유어를 쓰면서 어색한 건 당황스러운 시추에이션입니까?
하루에 한 번씩 자고 있는 우리 고유어를 깨우는 방송이 있습니다. 일어나든 못 일어나든 계속해서 깨울 겁니다. 사전 속에서 콜콜 자고 있는 우리 고유어, 함께 깨워보는 건 어떨까요? - 방송작가 박연희
대화에 나온 낱말 뜻풀이
* 낯꽃 : = 안색(顔色)
* 곰삭다 : 스스럼없이 가까워지다.
* 넘놀다 : 넘나들며 놀다.
* 서머하다 : 미안해서 볼 낯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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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5년, 문화방송 <방송과 우리말> 2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