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갈에도 난 노염이고 넌 귀염이겠지
이 낱말을 소개하려면 열받는 일을 쓰지 않을 수 없겠다. 행복한 일을 쓰라면 뭘 쓸지 몰라서 잠시 고민을 해야겠지만 열받는 일이라면 그 중에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된다.
내가 20대일 때 이야기를 골라봤다.
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를 태워서 시장에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앞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후진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뒤로 갈 공간이 없어서 어..어? 하면서 자동차의 경적을 울렸지만 이를 인지하지 못한 운전자는 결국 내 차를 박았다.
차에서 내려서 보니 같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다른 층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놀라면서 '어머 차가 있는 줄 몰랐네, 미안해서 어쩌죠.'라고 말하였다. 나는 사고가 나면 보험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러려고 했지만 동네 아줌마이고, 그분이 지금 너무 바빠서 보험회사를 기다릴 수가 없다고, 서로 어디 사는지 다 아니까 이따가 만나 다시 이야기하자는 말을 듣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경비아저씨가 듣고 있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도 시장에 다녀왔고 저녁이 되어서 그 집에 인터폰을 하였다. 그러자 그 아줌마가 이렇게 말했다.
"누구시라고요? 전 오늘 외출한 적도, 운전한 적도 없는데요?"
난 화내지 않았다. 그냥 "알았습니다. 보험을 부르지 않은 제 잘못이죠. 경찰을 부르겠습니다."하고 끊었다. 그 길로 경찰서에 갔고 사건을 접수했고 경찰들도 그 분이 이상하다는 점을 알았고 결과적으로는 그분의 남편을 통해 잘 해결되었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편 분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끝까지 부인의 말을 믿었다. 그녀가 외출을 한 적이 없고 운전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걸 믿었다. 젊은 여자가 이유없이 노부부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경비아저씨와 여러 가지 증거들을 보고서야 내 말을 믿었다.
이런 상황에서 쓰는 우리말이 바로 '노염'이다. 사고를 낸 아줌마에게 대놓고 화를 내진 않았지만 난 노염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노여움'의 준말이 바로 '노염'이다.
노염
분하고 섭섭하여 화가 치미는 감정. ≒노혐.
노여움을 풀다.
그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가득 찼다.
아무 말이나 신박하게 줄여 쓰는 능력이 있는 우리들이지만 실제로 사전에 있는 준말들은 잘 쓰지 않아 점점 잊히고 있다. 노염도 그 중 하나이지 않을까. 비슷한 말로 '노혐'도 있다. 극혐은 알아도 노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뭐니뭐니해도 '염'으로 끝나는 말 중에 최고는 '귀염'일 거다. 표준어였다.
귀염「명사」
「1」 예쁘거나 애교가 있어 사랑스러움.
「2」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아끼고 사랑스러워하는 마음.
'귀염'은 남편이 내게 자주 하던 말 10위 안에 드는데, 내가 귀여워서가 아니라 다른 뜻으로 한 말이었다.
"네가 그러니까 귀염을 못 받는 거야."
귀엽다는 말을 1번 들으면 <내가 그래서 귀염을 못 받는다>는 이야기는 30번을 들었다. 같은 말을 오래도록 듣다보면 아 난 이래서 귀엽지 않아. 귀염을 못 받아. 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정서 학대, 심리 학대, 요즘에 인기 있는 말로는 가스라이팅이다. 쳇.
거짓말을 해도 철석같이 믿어주던 그 아줌마의 남편은 몇 년 뒤 자살을 했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나랑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난 충격을 받았다. 왜 자기 부인을 괴롭히냐며 따지던 그 사람의 모습이 한동안 계속 떠올랐다.
'갈'은 내가 사전에서 제일 좋아하는 준말이다. '가을'의 준말이 갈이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준말은 '갈'이다.
쓸데없는 옛날 기억들도 갑자기 꺼내게 되는 그런 계절이 갈이다. 그때의 노염, 부인에 대한 믿음과 죽음, 내가 귀염이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이 다 섞여서 머리를 어지른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땅에 닿기 전에 잡으면 행운이 온다고 말하면서도 까르르 웃으며 '엄마! 잡았어!'하는 작은 사람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기쁘게 반응해주지 못하는 그런 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