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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Apr 02. 2021

쓴다

왜 저를...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글 쓰는 일로 생활비를 벌어 사는 사람이지만 원고지 아니 컴퓨터 보다는 티비나 술자리에 앞에 앉아있는 일이 더 잦다. 그러므로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았다는 건 뭔가를 당차게 써보겠다는 뜻이다.


예전엔 블로그에 글을 썼다.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일상을 적는 것만으로도 해소가 되었다. 오늘 일상을 적는 것은 내년의 오늘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내가 작년 오늘에 뭐했는지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블로그에 적어두면 알아서 과거를 띄어줬다. 싸이월드에도 같은 기능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그곳은 사진 위주로 이용하다보니 읽을 건 별로 없었다.


더 예전엔 프리챌이 있었다. 커뮤니티를 갖고 있었는데 20대 초반의 호기로운 글들이 잔뜩 있던 곳이었다. 읽어주는 회원수도 꽤 있었다. 당시 글을 보면 그때는 젊은 것 자체가 반짝반짝 빛나는 거였는데 연극영화과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그런 걸 모르고 지냈다. 연기를 전공하는 예쁜 친구들 사이에서 영문학과인 내가 젊어서 반짝반짝인다는 걸 알리가 있나. 대신 예쁜 사람들의 삶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일찍 알았다.


일단 길을 걸을 수가 없다. 등장하는 순간 반경 100m 이내 남자들이 갑자기 빈 종이를 찾는다. 그땐 그랬다. 너무 관심 있다며, 제 스타일이라며 자기 위주의 쪽지를 적어 건넸다.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관심을 표현하는지 궁금하다. 앱이 있다는 거 같은데 그걸 켜면 반경 100m 안에 싱글이 몇 명 있는지 알고 프로필을 누르고 마음에 들면 온라인 쪽지를 보내겠지? 방법이 바뀌었으니 자기 위주로 쓰던 내용도 바뀌었기를 빈다.


그리고 그 옛날 옛적엔 종이 일기장이 있었다. 아직도 몇 권을 갖고 있는데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머릿속에 저장하려니 하드웨어 사양이 안 된다. 그러다보니 들고 이리저리 몇 번이나 이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여러 권의 일기장 사이에서 친구와 주고 받던 교환 일기장도 발견되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는데 각자 미국으로, 영국으로 가서 바삐 사느라 매일 연락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지?' 이메일 한번에 백마디 답장을 할 수 있는 그런 사이. 최근에 알고 보니 그 친구도 한국으로 들어와 있었고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나누었다.


"야, 10대 때 그 일기장 우리 집에 있더라. 부끄러워서 열어보지는 않았는데 너가 괜찮다고 하면 읽지 않고 버릴까 하는데 어때?"


그런데 친구는 단호했다.


"안 돼! 절대 버리지 마. 표지도 기억나는데 그게 너희 집에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다시는 열어보지 않겠지만 그래도 친구가 버리라고 하지 않아주어서 다행이었다. 한 70세가 되면 함께 열어볼 용기가 날까?


그리고 요즘엔 브런치가 있다. 그냥 있다는 거지 뭐 훌륭한 플랫폼이니 대단하다느니라는 건 아니다. 싸이월드를 사진 위주로 이용했던 것처럼 나는 브런치를 글 위주로 이용하고 있는데 클럽하우스처럼 누구나 쉽게 이용자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클럽하우스처럼 그 매력은 아주 빠르게 희미해졌다. 그래도 브런치라도 하니까 가끔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뭐라도 쓰니 고맙게 여기고 있다. 프리챌이나 싸이월드처럼 내가 적어온 것들이 폭파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사도 지긋지긋하다. 수년 뒤에 '예전엔 브런치라는 게 있었다..'라고 시작되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블로그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진짜 볼 거 없고 헛소리만 지껄이는데 왜들 들어오세요, 했더니 그 헛소리를 듣고 싶어서 오신단다. 사실 헛소리라면 타의 추종을 허가하지 않는데, 브런치가 묘하게 풍기는 '너는 작가다! 헛소리 금지!' 느낌 때문에 잘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브런치에서는 내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닌 것처럼 표준어와 영어도 섞어서 '가장 안전한 회색' 포장지에 싸 내놓는 느낌이다.


어쨌든 쓴다.

여겨쓴다.  

오지게 쓰지만

요란하지 않게 쓴다.

우리말 얘기도 쓰고

유케이(UK)에서 살다 온 얘기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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