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고
문득 그동안 들어온 말들이 생각났다.
가수와 노래방을 간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가수와 노래방을 가는 일이 평범하게 있는 일은 아니지만 끼 많은 친구들을 둔 덕에 또는 방송작가인 덕에 그럴 일이 꽤 있었다. 내가 노래를 끝내면 가수들은 빈말일지라도
“와 너 가수해도 되겠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친구들이 노래 잘한다고 말해준 것과는 조금 다른 감동이 있었다. 노래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노래를 잘한다고 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배우와 술을 마셨다. 그녀는
“너 다음엔 배우로 작품 같이 하자. 지금 이게 가만히 앉아서 글 쓸 열정이 아닌데?”
배우가 그렇게 이야기 해주니까 느낌이 또 달랐다. 빈말일지라도, 술김에 하는 말일지라도, 립서비스(요즘도 이런 말 하나?)일지라도, 배우가 내게 작가도 아니고 배우로 작품을 같이 하자는데, 기분이가 둥둥 뜬다.
코미디언에게 코미디언을 해도 될 만큼 재미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봤고 도서관 사서에겐 동화구연을 해도 될 만큼 책을 잘 읽어준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고보니 그 분야의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많이 들어온 것이다.
사람은 받은 사랑만큼, 받은 관심만큼 그 사랑과 관심을 남에게도 줄 수 있다.
나는 작가니까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에게 그래, 잘 쓴다, 잘 쓰네, 열심히 써봐, 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정말 자주 생각나는 지난 기억 가운데 문예창작학과 교수님과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이 있다.
그럼 교수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 챙기시고 또 뵈어요. 따위의 말을 나누고 밖에서 헤어지는 그림이었다. 교수님은 사무실로, 나는 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교수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 너 계속 써야 해! 쉬지 말고 계속 써!
내가 태어난 해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유명한 소설가가, 분명 끝인사도 다 했는데, 다시 나를 불러서 계속 쓰라고 한다.
이 기억이 부채(負債)로 남는 느낌이 있기도 하지만
이 기억 덕분에 내가 계속해서 꿈을 꿀 수 있기도 하다.
역작을 써보고 싶다.
내가 보려고 쓰는 글이라도 한번 써보고 싶다.
출판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출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나도 여러 번 해보았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나만 할 수 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내가 했기 때문에 의미가 생기는 것이 분명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남들이 해주는 '해도 되겠다'는 말이 큰 힘이 된다.
그 남들이 자기 분야에서 오래 버텨온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 해도 될까? 를 끝내고
해보자. 하자. 해. 의 길을 걷는 것
이게 여전히 어렵다.
나는 여전히 물음표를 업고 갈지자를 그리며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