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동생이 낳은 첫 손주
심리 상담사가 나에게 자주 하던 말 중 하나는 '나보다 더 심한 역경과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였다. 내가 내 또래에 비해 보통적이고 보편적인 삶을 산 것은 결코 아니지만 상담사의 눈에는 그게 그렇게 너무 힘든 삶도 아니었다고 본 거다.
그 말이 딱히 위로가 된 건 아니었다.
집도 절도 없이 길에 나앉은 사람들을 보면서
아, 그래도 난 저들보다 낫다..! 따위의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내 삶이 보편적이지 않게 된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동생의 탄생이다.
동생이 태어난 것이 동생의 잘못은 아니다.
1980년대 대한민국.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할 때. 나무 위키를 찾아보니 이 사상이 없었던 문명은 그동안 없었던 걸로 보여진다. 노동력에 도움을 주던 신체적 특성 때문이라고. 나도 아버지 없이 27년, 남편 없이 2년을 여자들끼리만 살아보니 남성의 신체적 특성(예를 들어 병뚜껑을 한 방에 따는 것 같은)이 필요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엄마는 남자 형제가 가득한 남자와 결혼했고 그 형제들은 모두 다 아들을 둘셋씩 낳아놓은 상태였다. 건강이 딱히 나쁜 것도 아니지만 평생을 연약한 편에 속하던 엄마가 목숨을 걸고 낳은 첫 번째 아이가 여자 아이였던 것이다. 집안의 눈치를 몇 년 보았을 테고 결국 다시 목숨을 걸었고 아들을 낳는 데 성공하였다.
나는 돌사진이 없다.
남동생의 돌 잔치 사진에서 동생을 가운데에 두고 입이 댓 발 나와 옆으로 서서 빨갛게 눈이 부어 울고 있는 사진은 있다.
어렸어도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은 알았던 모양이다.
아직도 그 사진을 보면 집안 어른들의 '야 너도 옆에 서, 저기 서 있어 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머니는 남동생을 목숨을 걸고 낳은 거네요. 출산을 한번 더 하면 의사가 죽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도 남동생을 낳겠다고 목숨을 건 거잖아요. 그런 사람한테 뭘 바라는 거예요 지금?
상담사의 말이다.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해보고자 시작한 상담이 엉뚱하게 내 가족을 미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남편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알고보니 내 가족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창 상담 중일 시기에 이런 일이 터졌다.
딩크족이었던 동생부부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었고 아직 배가 부르기도 전에 명절이 되어 집에 찾아왔다.
해외에 정착해 산다고 들은 시누이가 애랑 같이 시댁에 다시 들어와 산다더라, 라는 말이 올케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댁에 가면 시누이까지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상담사 피셜, 똑똑하지 않은 엄마는
코로나를 뚫고 오랜만에 며느리가 방문을 하자 결국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이고 우리 첫 손주 왔는가?
그 말을 나도 들었고 첫 손주인 내 아이도 들었다.
엄마에게는 나의 남동생, 그러니까 아들의 첫 번째 아이가 첫 손주였던 것이다.
나는 그날 동생부부가 가고 나서 엄마에게 굉장히 화를 많이 냈다.
내가 친정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면 안 들었어도 될 말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속으로 뭘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변하는 건 아니다.
엄마의 며느리는 딸을 낳았다. 언제 딩크족이었냐는 듯이 남동생은 다음엔 아들을 낳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해외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바람에 조리원 같은 건 꿈꾸지 않았다. 병원에서 주는 시리얼이 아침이었고 그것도 이틀인가 3일 뒤에 퇴원하였다. 그나마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늦게 퇴원한 거였는데 내가 저체중이었고 아기가 3주 일찍 태어난 탓이었다.
엄마의 며느리가 한국에서 아이를 낳은 게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을 때마다 엄마를 불러대는 게 동생부부의 잘못은 아니다.
원래 다 그러고 산다더라.
하지만 내가 그러고 못 산 거다.
아이가 3주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나는 엄마의 돌봄을 받지 못하였다. 아이를 낳고 바쁜 일들이 다 끝나 어느 정도 육아가 익숙해졌을 때 예정일에 맞추어 예약되어있던 비행기를 타고 오셨다. 하지만 영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셨기에 장보는 것도 내가, 영어로 된 세탁기를 돌리는 것도 내가 했어야 했다. 결국 엄마의 손길이 딱히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여기 내가 할 것도 없네. 그냥 일정 당겨서 한국 갈까봐. 말도 안 통하고.. 답답해.
라고 엄마가 말했다.
나는 지금 사정 상 엄마와 함께 사는 바람에
엄마가 '첫 손주를 낳아준' '며느리/아들'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는지'에 민감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동생부부의 잘못이 아니다.
나와 엄마와의 문제이다.
나는 대인이 되지 못했다.
용서도 되지 않고
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상담이 도움이 될 거라고 믿으며
먼 길을 타달타달 하릴없이
남편 회사 앞에 있는 상담사를 만나러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