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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Dec 30. 2016

여행자의 단골집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9

한국에서 미리 준비한 게 있다면 바로 오늘 참여하기로 한 “도오루 밸리 당일 투어”이다. 현지 여행사의 가이드와 함께 도오루 밸리로 이동해 구경하고, 와이너리도 두어군데 정도 들러 와인 테이스팅도 하는 일정이다. 차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가이드가 다 알아서 데려다주고 설명해주고 밥도 먹여준다. 내리라고 할 때 내리고, 타라고 할 때 타면 된다. 보통은 그런 점이 싫어서 패키지로 구성된 여행 상품을 꺼리지만 일단 와인 테이스팅을 하면 운전을 할 수가 없으니까, 스스로 차를 끌고 다니면서 경험하기는 어려운 내용이다. 물론 도오루 밸리가 포르투에서 꽤나 멀기도 멀다.


오늘 투어엔 두 명의 캐나다 언니들도 함께 했다. 그리고 그 두 언니는 우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아챘다.


난 가끔 나의 보여지는 모습과 나의 국적이 완전히 상이한 상황을 꿈꾼다. 누가 봐도 한국인인데 스페인 여권을 내민다거나, 러시아어로 말문을 연다거나 해서 주위의 기대감을 깨트리고 싶다. 한국인 맞죠? 라고 했을 때 아니요. 아이슬란드에서 왔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 때도 한국인인걸 들켜서 딱히 기분이 나빴던건 아니었는데, 나도 나의 이런 마음 상태를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예전에 몇 번은 내가 국적이 모호한 생김새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 적 있다. 아시아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히스패닉인 것 같기도 하고 라틴계인 것 같기도 한 그런 모습. 그래서 그 어느 곳에서도 이질감 없이 ‘현지인’으로 보일 생김새 말이다. 그럼 딱히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거나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을테니까 좀 더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모습은 외국에선 잘 스며들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에선 더 주의를 끌기 십상일 것 같으니 접자.


짙었던 아침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며 도오루 밸리의 모습이 드러난다. 가파른 산기슭에 포도를 키우기 위해 계단식으로 포도밭을 만들어둔 모습! 엄청나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렇게 했겠지 하고 생각하니 동서양을 통틀어 밥벌이는 참 어려운 일인 듯 싶다. 게다가 그 ‘계단’ 하나하나의 폭이 좁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할 수 없어 일일이 다 직접 손으로 작업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조금 슬프기까지 했다.


피냥이라는 도오루 밸리의 작은 마을에서는 한 시간 정도 배를 탔다. 풍경이 멋진 건 좋았지만 맞바람이 치니 어찌나 춥던지 막바지엔 승객과 운전수 모두 오들오들 떨었다.


오늘 하루 동안 와이너리 두 군데를 들러서 실컷 와인 시음을 했고, 점심 식사를 할 때도 또 와인을 마셨으니 도합 제법 많은 술을 마셨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포르투로 돌아오니 멀쩡한 사람은 가이드 뿐. 게다가 결과적으로 우린 어제도 과음, 오늘도 연달아 과음한 꼴이다. 해장이 필요하구나. 숙소 근처 중식당으로 가자.

와인의 색깔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흰 종이를 깔아준다


원래 탕 종류는 애피타이저 용도여서 작은 사이즈만 있다길래 해장을 위해 크게 만들어달라고 주방에 특별히 부탁했다. 여기에 공기 밥까지 말아먹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다른건 몰라도 해장만큼은 정말 다른 음식으로 못하겠다. 아마 처음에 그렇게 배워서 그런 것이겠지. 커피나 아이스크림으로도 할 수는 있는데 그것들도 역시나 국물을 먹은 다음이어야 한다. 콩나물국이라든가 북어국을 구할 수 없다면 하다 못해 우동이나 라면 국물이라도 있어야 한다. 술을 마시고 난 뒤, 허했던 배가 빠르게 따뜻해지는 그 느낌이 몹시 좋다. 그러니까 국물 없는 삶은 상상하지 않는 걸로.

△ 완탕 soup와 흰 쌀밥 덕에 죽다 살아났다.


이렇듯 외지에서 만나는 중식당은 거의 신의 축복이다. 만약에 비슷한 상황에서 중식당이 없다면 태국 음식점이나 베트남 음식점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쌀로 죽을 끓여달라고 부탁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중식당은 어디에나 있다. 게다가 이 집엔 어제도 왔고 오늘도 왔으니, 이 집은 어느새 ‘여행자의 단골 집’이 된 셈이다.


그리고 난 짜장이나 짬뽕이 아닌 중국 음식을 좋아하는데, 그런건 사실 한국에선 쉽게 먹기가 어려워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 먹으려 애쓴다. ‘차이니즈 프라이드 누들’ 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볶음 국수는 사랑한다. 이 집에선 ‘토푸 온 핫 아이론’이라고 표기해둔 두부 야채 볶음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곳에 갈 때마다 종업원들은 무척 반가워하며 중국어로 말을 거는데 그들이 가지는 일종의 기대를 깨는 것 같아 가끔은 미안하기도 하다. 이날도 종업원들로부터 ‘중국인이냐’, ‘중국어를 할 수 있느냐’, ‘학생이냐’ 따위의 질문을 몇 번 받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젓가락을 사용하는 테이블은 우리 뿐이다. 다들 국수를 스파게티 먹듯 포크로 돌돌 말아 먹고 있다. 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우릴 보고 조금이나마 안도했지 않을까?


오, 진짜 중국인이 먹고 있네. 맛있는 집인가 봐!



덧붙이는 말

1.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잠시 찍고 가는 곳” 정도로만 알려진 포르투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여행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2. 매거진 제목은 가토 다이조 著,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3. 이 이야기는 저의 개인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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